[추억속으로] 터널과 옛 도로의 애환 <상>이화령과 죽령

입력 2005-05-11 08:39:52

터널 뚫리면서 '가지 않는 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미국의 시인 프로스트는 시 '가지 않은 길'에서 인생의 선택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 고뇌를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백으로 들려주고 있다.

'가지 않은 길'은 인생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천년의 세월을 이어오던 우리 옛길도 '산업혈맥' 고속도로의 등장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옛 영화를 뒤로 한 채 잊혀가는 '가지 않은 길'을 다시 가봤다.

소백산 산허리를 넘어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서 충북 단양군 대강면을 넘어가는 아흔아홉굽이의 험준한 고갯길, 죽령(해발 689m).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영주·봉화가, 서쪽으로는 월악산·금수산이, 남쪽으로는 소백산 일대 첩첩산중이, 북쪽으로는 연화봉과 비로봉, 국망봉 등이 펼쳐진다.

신라때 죽죽(竹竹)이란 사람이 닦았다고 해 죽령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이 길은 한때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가 되기도 했고 옛 선비들의 과거길이기도 했으며 영남에서 기호로 통하는 중용한 관문이었다

하지만 2001년 12월 국내 최장 길이를 자랑하는 중앙고속도로 죽령터널(4.5km)이 뚫리면서 죽령은 그 옛날처럼 다시 한적한 길이 되고 말았다.

지나가는 객들이 뜸해지면서 죽령고개를 사이에 두고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가 경쟁적으로 설치한 단양휴게소와 죽령주막도 수년 전의 영화를 뒤로 한 채 빛이 바랬다.

단양휴게소는 아예 민박촌으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고 죽령주막은 어쩌다 찾는 길손들과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등산객들의 '오아시스'로 명맥을 겨우 이어오고 있다.

10여 년째 죽령주막을 운영해오고 있는 안정자(49·여)씨는 "죽령터널이 개통된 뒤 이곳을 지나는 차량들과 길손은 셀 수 있을 정도"라며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1년 중 절반은 문을 닫아 놓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한때 도내 최고를 자랑하며 6, 7명의 경찰과 전·의경이 근무하던 죽령검문소도 '휴업'에 들어간 지 오래다.

터널이 뚫리면서 폭설·사고걱정, 수배자 검거도 옛일이 됐기 때문이다.

검문소 문은 굳게 닫히고 색바랜 경찰초소와 범죄감식 카메라만이 험준한 죽령을 지키고 있다.

검문소에서 100m쯤 떨어진 시설지구에 들어선 여관과 상가, 간이휴게소들도 마찬가지. 터널 개통 이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경제적인 타격을 입고 있다.

예전 같으면 죽령길 차량운전은 꿈도 못꾸었을 초보운전자들이 주행연습에 나서는 진풍경은 쇠락한 죽령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문경시와 충북 괴산군 연풍면을 잇는 이화령(해발 546m)은 요즘 인근 4차로 국도와 고속도로를 오가던 사람 중 특별한 추억이 있거나 그냥 오랜만에 한 번 넘어가 보고 싶어 찾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이가 지긋한 부부 또는 원로 산악인들은 도로변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워놓고 맑은 솔향 공기도 쐬고, 이름 모를 들꽃도 구경하고, 더러는 차 속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다.

이따금씩은 소를 몰고 밭일을 가는 마을 아주머니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화령을 통과하는 국도 3호선에 지난 98년 10월 20일 민자사업으로 1.6km 터널이 뚫린 데다 지난해 12월 김천-경기도 여주 간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옛 고갯길은 완전히 추억 속 도로가 된 것.

한정수(68·서울)씨는 "과거 겨울에 이곳에 오면 차들이 눈길을 오르지 못해 줄지어 서 있었다"며 "20여 년 전 이화령 정상에서 조령산까지 눈길 산행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고 회고했다.

사실 국도 터널 개통 이전까지만 해도 이화령 옛길은 하루 차량 통행량이 2만 대에 육박할 정도로 서울~부산을 오가는 화물차들이 밤새 꼬리를 이었다.

문경 각서리와 고개 너머 괴산군 행촌리 주민들은 길가에서 봄나물, 고구마, 사과, 수박 등을 내다 팔면서 자녀 교육을 시켰다.

차량 성능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던 80년대 초만 해도 이화령 70여 구빗길에는 고개를 단숨에 넘지 못하고 차를 세워둔 채 엔진도 식히고, 요기도 하고, 땀도 말리는 운전자들이 많았다.

자연스레 모르는 사람끼리도 인사를 나누며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눴지만 그런 정겨운 풍경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국도 터널이 뚫리면서 이화령 양쪽 편 100여 가구는 장사가 안돼 일부는 도시로 떠나기도 했다.

김원철(72·충북 연풍면 행촌리)씨는 "한여름철에는 길가에 큰 가마솥을 걸고 하루 종일 옥수수를 삶아냈는데 이젠 먹고 살기도 곤란해졌다"며 지난날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이러한 적막감도 잠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주민들은 새로운 고민거리를 떠안았다.

마을을 휘감은 수십m 높이 고속도로 교량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또 교량 아래 사과밭에는 종일 15~20m 폭으로 그늘이 생겨나 농사에도 막대한 지장이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경·장영화기자 yhjang@imaeil.com 영주·마경대기자 kdm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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