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후, 날씨가 좋아 산책이라도 할 양으로 집 근처 초등학교로 나갔다. 뒷마당으로 돌아서는데 놀이터 벤치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대여섯 명이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몇 학년이냐"라고 묻자 대뜸 "뭡니까?", "고등학교 졸업한 게 언젠데 왜 그래요?"라며 삐딱한 눈길을 보냈다.
한참을 다독이니 고3이라고들 했다. "오늘 여기서 싸움 연습하냐?"고 물었더니 "우리 일진회 아니에요. 그럴 나이는 지났잖아요"라며 피식 웃었다. 손을 보니 화투가 들려 있었다. 눈치를 채고는 재미 삼아 도리짓고땡을 한다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왜 하필 어린 동생들이 뛰어노는 초등학교에 몰려다니느냐고 했더니 "갈 데가 어디 있나요"라며 "애들이 왜 일진 일진하는지 아세요?"라고 되물었다. "폼 나거든요. 학교 안에서부터 인정받아요. 친구들은 대접해 주고, 선생님들도 대충 눈감아 주고. 선도부 시켜주는 선생님도 있어요."
학생들은 "어른하고 이런 이야기 하긴 처음인데요"라고 키득거리며 저희들이 보는 요즘 세태를 신나게 떠들어댔다. 학교 안에서 학교 밖에서 어른들이 보여주는 세상이 어떤지, 그걸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기서 무엇을 배우는지.
학생들은 이미 힘과 폭력이 우선되는 현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TV나 영화에서 보이는 장면을 그대로의 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어른들 가운데 누구도 거기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고, 오히려 힘으로 자신들을 압박하는 똑같은 모습만 보여준다고 투덜댔다. "학교를 졸업하면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머리카락 길이를 재고, 기합을 주고, 뒷머리나 옆머리를 밀어버리는 곳이라는 기억이 가장 오래 남을 것 같아요."
경찰이 갑작스레 학교 폭력을 시급한 문제라며 떠들고 나선 지 몇 달이 지났다. 언론도 너나 없이 마치 새롭게 큰일이나 벌어진 양 동조했다. 자진 신고한 학생이 몇 명이고, 해체된 폭력 조직이 몇 개고, 입건을 몇 명 했고 등이 수없이 발표됐지만 학생들이 왜 그런 지경에 몰렸는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은 드물다. 폭행과 금품 갈취, 보복 폭력 등 학생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만 난무할 뿐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추궁은 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법을 만들고, 강하게 단속을 하면 뿌리 뽑을 수 있다는 어른들 방식의 대책만 내세운다. 교육부는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점잖게 한마디 할 뿐이다. "학교에 맡겨 달라"는 교사들의 목소리는 공허하게 맴돈다. 우리가 먼저 반성하자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결국, 담배를 뻐끔거리며 화투를 치는 학생들에게 한마디 꾸지람은커녕 변변한 말대꾸조차 못한 채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김재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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