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러시아의 봄

입력 2005-04-11 08:58:15

우리나라에서 눈은 낭만과 대풍(大豊)의 이미지인데 반해 1년의 절반이 겨울인 러시아인들에겐 삶을 얼게 하는 한(恨)의 대상이다.

눈 때문에 도로에 차선이 없어지고 차들은 종횡무진 곡예를 하며 교통을 마비시킨다.

지치도록 내리는 눈 탓에 지방 간 왕래가 어려워 서로 다른 사투리와 언어들이 생기고, 또 130여 개의 각기 다른 민족들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유럽에서 11번, 러시아에서 3번의 겨울을 보낸 필자에게 눈은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10년 전, 헝가리 연주 후 빈에 도착했을 때가 새벽 2시경, 불만족스러운 연주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한데 눈까지 펑펑 쏟아지니 그냥 숙소로 갈 수가 없었다.

무작정 차를 몰아 칼렌베르그(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알프스 끝자락) 정상에 오르니 새하얀 눈이 가로등 불빛에 보석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오른 전망대 아래 펼쳐진 형형색색 반짝이는 빈의 야경은 스트레스를 날려주었고 새로운 힘과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오스트리아의 눈이 초콜릿 같다면 러시아의 눈은 철학자의 이미지다.

삶의 고뇌와 아픔, 뭔가 안타깝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고스란히 묻어둔 채 무심히 발을 옮기는 순례자 같다.

지금 필자의 숙소 창밖 작은 공원엔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러시아의 젖줄인 볼가강도 아직은 하얀 천을 덮고 포근히 자고 있다.

하지만 털모자 없이는 겨울을 나기 힘든 러시아인들이 하나둘 모자를 벗는 걸 보니 곧 봄이 오려나보다.

눈이 녹으면 겨우내 뿌렸던 모래·흙 등으로 도로는 온통 흙탕물 범벅이 될 것이고, 눈 녹이는 약품 때문에 지워졌던 차선을 다시 칠하느라 도로는 막힐 것이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불평않는 이들의 성격은 오랫동안 눈보라와 싸워오며 적응된 여유일 것이다.

이제 곧 볼가강의 뱃노래가 시작되고, 철학적인 계절을 넘어 낭만과 예술의 계절로 들어설 것이다.

지휘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