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없고, 아빠는 무관심…또다른 소외층
경북 농촌 마을에 국제 결혼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국내에서 색시를 구하지 못한 농촌 노총각들은 중국, 필리핀, 베트남, 태국 등으로 동남아 원정길에 나섰다. 그로부터 10여 년. 이제 농촌은 한국인 아버지와 동남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2세들로 봇물을 이루고 있다. 특히 농촌 자연부락에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 상당수가 이들 2세들이다. 이들은 우리와 똑같은 한국인이다. 하지만 엄마가 떠나고,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거나 교육도 뒤처지는 등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있다.
◇엄마가 없다
박민희(9·가명·상주 ㅅ초교 1년)양과 세 동생은 할머니(74) 손에서 자라고 있다. 필리핀 '엄마'(36)는 산아 제한을 엄격히 금지하는 고향 풍습에 따라 4남매나 낳았지만 끝내 농촌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민희 엄마는 '돈을 벌고 싶다'며 막내(3) 산후조리가 끝나자마자 도시 공단에 취직한 것.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한달에 한 번 정도만 가족을 찾고 있다. 할머니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며느리라 알아듣게 타이를 수도 없었다"며 "요즘은 집에 들르는 횟수도 자꾸 줄어 걱정"이라고 했다.
이웃들에 따르면 매일 술에 절어 사는 아빠(45)도 아이들을 제대로 돌 볼 능력이 없어 엄마의 빈자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민희 경우 점점 말을 잃고 있었다. 학교 관계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는 데다 친구들도 얼굴 생김새가 다른 민희와 마음껏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둘째 정민(6·가명)이는 성장 발육이 더뎌 또래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한창 때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때문이다. 4남매는 이제 생이별할 위기에 놓여 있다. 동네 주민들은 "할머니 혼자 4남매를 키우지 못해 막내(3)는 다른 친지나 가족들에게 맡겨야 할 형편"이라고 귀띔했다.
◇이국 땅으로
2003년 4월 1일 문경시 영순면 이목2리에서 태어난 강경문 군은 생후 1년 5개월 만에 필리핀 외가에 맡겨졌다. 엄마 나랏실 옹아이(44·필리핀)씨는 "너무 가난해 애 키울 능력조차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옹아이씨 3가족은 3평짜리 단칸방에 살고 있다. 수입이라곤 옹아이씨가 버는 월 80만 원이 전부다. 일주에 두번은 초등학교 영어강사로, 나머지 3일은 자활센터 간병일을 하고 있다.
1996년 필리핀 여성 중 가장 먼저 문경에 시집 온 그는 지난 9년간 단 하루도 편히 쉬어 본 적이 없다. 처음 1년은 수박, 오이 농사를 지었고, 첫딸 은나(9)를 낳자마자 남편과 트럭 행상을 시작했다. 문경, 예천, 상주 등을 돌아다니며 과일을 팔았다. 하지만 경제 사정은 나날이 나빠졌다. 경기 불황으로 장사를 그만 둔 남편(52)은 8개월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옹아이씨는 "혼자 생계를 책임지느라 애 키울 엄두도 못낸 것"이라며 "오는 6월에 둘째를 데려 올 계획이지만 제때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가 우리 사회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눈물지었다.
◇언어 장애
김대건(6·가명·영주시 상망동)군은 '발달성 언어장애'를 겪고 있다. 엄마 린다(40·필리핀)씨는 "이름, 나이 등 기초적 단어만 나열할 뿐 제대로 된 의사표현은 불가능하다"며 "또래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해 걱정"이라고 했다. 농촌 국제결혼 부부들은 자녀 교육 문제에 가장 큰 어려움을 호소했다. 김영복(43·영주시 단산면 병산리), 리나 알리야(33·필리핀) 부부는 "우리말이 서툰 외국인 주부들이 자녀들에게 한국인으로서 필요한 인성, 언어, 예절, 문화 등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씨의 큰 딸 역시 태어나서 3, 4년까지는 우리말을 잘 못해 부부의 애를 태웠다. 김씨는 "어린이집에서 또래들과 어울리고 나서야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부는 둘째만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어린이집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농번기에는 남의 땅을 대신 지어주고 농한기에는 하루하루 막노동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김씨는 "교육비 걱정 때문에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영주시 필리핀 주부들의 모임에 참가하고 있는 알리야씨도 "가난한 살림에 어린이집에 보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국제결혼 부부들이 상당수"라며 "농촌 인구 늘리기를 강조하는 정부나 지자체가 국제결혼 2세들의 교육 지원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말했다.
◇마을에는 우리뿐
영주시 문수면 월호1리 다락곡 본마을. 25가구 50여명이 모여사는 이곳엔 지난해 5월 큰 경사가 났다.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아기가 태어난 것. 주인공은 남종길(43), 레호앙티에트(26·베트남) 부부의 첫 아들 민국(가명)이다.
민국이는 거의 매일 마을 회관으로 불려나간다. 어르신들이 민국이의 재롱을 보기 위해 자꾸 찾기 때문이다. 남씨는 "하지만 교육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했다. 베트남 아내가 아직 우리말을 잘 못해 아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영주 시내에 어린이집이 있기는 하지만 3세 이전까지는 집에서 교육해야 한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아내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며 "부인과 아들에게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가르칠 수 있는 교육기관 설립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안동 여성병원에는 지난 15, 16일 연이틀에 걸쳐 2명의 국제결혼 부부 2세가 태어났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다 한국 신부를 구하지 못해 베트남 처녀와 결혼한 윤상규(48·예천군 유천면), 김진동(36·개포면)씨가 하루 사이를 두고 아버지가 된 것.
베트남 부부들의 모임 예천군 베트남회에 따르면 올해 태어난 국제결혼 2세들만 벌써 3명으로 3월, 5월, 6월, 7월 출산 예정인 베트남 신부들도 4명이나 된다. 베트남회 남편들은 "하지만 2세를 얻은 기쁨은 잠시뿐"이라며 "아이들을 가르칠 교육기관이 너무 부족해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기획탐사팀=이종규기자 jonkgu@imaeil.com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사진설명 : 한국 국적을 취득, 엄연한 한국인인 태국출신 파차니 바우패스(40·여 봉화군 상운면)씨는 시부모님과 남편, 아들 3명과 함께 10년째 살고 있다. 농촌사회 적응이 힘들었다는 바우패스씨는 앞으로 아들교육이 걱정이라고 했다. 정우용기자 sajaho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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