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정현종 '흰 종이의 숨결'

입력 2005-01-05 09:04:15

흔히 한 장의 백지가

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

더 깊고

그 가장자리는

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

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

거기 쓰는 말이

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상품이고

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 명품이다

정현종 '흰 종이의 숨결'

여기 백지가 한 편의 시를 쓰고 있다.

추수를 끝낸 겨울 들판의 가없는 기도 같기도 하다.

지금 시인은 흰 종이 앞에 앉아 있다.

서구의 말라르메가 말한 백지의 공포인 완벽한 시를 쓰기 위한 강박관념이 아니다.

오히려 백지의 침묵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을 아끼고 그 행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결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시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말이 짓는 숨결과 소리에도 이끌려 광휘의 새론 집을 짓는 것. 참으로 상품의 글도, 명품의 글도 쓰기 어려움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흔히 한 장의 종이가 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 더 깊다'는 말이, 요즘 우후죽순같이 많은 우리 글쟁이들을 반성하게 한다.

박정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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