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포럼-'시간은 모든 것을 익어가게 한다'

입력 2004-12-28 08:59:22

지난 14일 오후 3시 국립현충원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이날 오전 결혼식을 올린 박지만 서향희 부부가 묘소 앞에 나란히 서서 묵념을 올리는 순간, 필자는 바로 그 옆에서 신랑 지만씨가 부모에게 올리는 헌사(獻辭)를 대신 읽어주고 있었다.

다음은 그 첫 대목.

"오늘은 소자 지만이가 한 가정의 지아비가 되어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이 길이 제게는 왜 이리 길고도 힘이 들었는지요. 하지만 이제 늦게나마 아버님 어머님께 자식의 도리를 한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

이날 박 대통령의 고향인 경북 구미에서 온 참배객들이 많았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행사가 끝난 뒤 내게 물었다.

"선생님은 박 대통령 때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아마 나를 '3공맨'으로 본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3공맨'이 아니라 그 비판자였다.

대학생 시절인 1962년 1월 1일 매일신문 신춘현상논문 '혁명 제2년의 정치적 과제'에서 "5·16 주체세력들은 민정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한 것을 시작으로 그 이후의 제반활동에서 한 번도 3공 정부나 여당을 지지한 일이 없다.

심지어 1969년 박 대통령을 위한 3선 개헌 때는 심야에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제3별관에서 밀실투표를 하고 나오는 공화당 의원들을 향해 "이 도둑놈들아"라고 삿대질하기도 했다.

4공화국인 유신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치부 기자인 내가 쓴 대부분 글의 주제는"정치부재는 유신체제에서 나온다", "국회의원들은 집에 가서 아기나 보라는 것이냐"라는 등으로 유신체제의 근본을 시비하는 것이었다.

박 정권과 나의 이런 관계는 박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계속됐다.

박 정권을 보는 나의 눈은 지금은 물론 많이 달라졌다.

박 대통령이 지하의 영령이 된 후 달라진 것이니까 그의 탄압에 굴복한 것도 아니고 그의 회유에 넘어간 것은 물론 아니다.

나 자신 공직생활도 거쳐보고 정치인 생활도 거쳐보는 과정에서 국가안보를 지키고 경제발전을 이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하나하나 인식하게 됐고, 따라서 그런 일을 이룬 고인에 대한 생각도 자연스레 바뀌어 간 것으로 풀이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다가 내가 정치인 시절 모셨던 박태준 전 국무총리가 박 대통령의 외아들 지만씨를 그동안 끔찍이 생각하고 여러 가지 관심을 가져 주었기 때문에 나도 자연히 지만씨를 자주 접하고 정리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그에게 장가가라는 말은 나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그러던 차 훌륭한 규수를 만났다는 전갈과 함께 부모님께 바치는 헌사를 대신 읽어줄 것을 청해 와서 너무도 반가운 마음으로 그 청을 수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박 대통령 생전에 그에게 줄곧 반대표만 던졌던 나였기에 세월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상을 가지게 된다.

프랑스 작가 라블레(1483~1553)는 "시간은 모든 것을 익어가게 한다"라고 말했던가.

시간이 사람을 변화시킨 대표적인 예는 바로 박 대통령이다.

그가 대한민국 건국 초기 남로당에 입당한 것은 세인이 공지하는 사실이다.

이 사실로 장교직위가 박탈되어 그는 문관이란 이름으로 육군본부에서 사실상 백의종군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처신을 분명히 했다.

1950년 6월25일, 그는 경북 구미 고향집에서 어머니 제사를 드리고 동네 손님들과 사랑방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낮 12시 조금 지나서 구미경찰서에서 순경 한 사람이 급한 전보를 가지고 왔다.

장도영 대령(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경찰을 통해 보낸 긴급전보였다.

'오늘 새벽 38선 전역에서 적이 공격을 개시, 급히 귀경'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곧장 경부선 상행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1975. 박정희 회상일기). 이런 모범적인 행동 등등이 감안돼 박 문관은 나중에 소령으로 복직되었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끝내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하는' 쿠데타의 중심에 선다.

이후의 박 대통령 행적은 더 이상 상술할 필요가 없고 이제 그가 그 아들로부터 들는 헌사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은자동아 금자동아 하시며 애지중지 길러주신 하해와 같은 은혜인데, 왜 제게는 그 은혜에 만 분의 1이나마 보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지요. 이제 저에게 남은 보은(報恩)의 길은 저도 자식을 낳아서 두 분께서 제게 주신 사랑을 이 아이들에게 전하는 것임을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

마지막 이 대목을 읽으면서 옆을 보니 지만씨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 목소리도 떨렸다.

박 대통령 내외도 지하에서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최재욱· 전 환경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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