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으로/가상르포-장돌뱅이 애환

입력 2004-10-11 09:07:06

조선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천시했다.

5일마다 열리는 정기시장은 15세기 말 성종 때 전라도에서 발생한 심각한 기근을 계기로 시작됐다.

그러나 삼한 시대에 이미 시장이 열렸다는 주장도 있다.

18세기 전국에 장시는 1천여 개에 달했다.

정기시장의 번성과 함께 주막과 객주도 번창했다.

조선시대 시장은 크게 시전(市廛)과 장시(場市)로 나눌 수 있다.

오늘날의 도시상가에 해당하는 시전은 한양, 개성, 평양, 수원 등 도시에 있었고, 장시는 전국에 퍼져 있었다.

전국의 장시를 떠돌며 살아가는 장돌뱅이의 하루를 살펴보았다.

-전문-

장돌뱅이 김말동씨는 턱수염이 지저분하고 얼굴이 시커멓다.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할 때까지 장시를 찾아 떠돌아다니느라 씻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챙이 좁은 갓을 쓰고 짚신을 신고 다닌다.

그의 지게에는 옹기그릇이 가득 실려 있다.

그의 동료들은 어물, 소금 등을 지고 다닌다.

대체로 값싼 제품들이다.

이들과 비슷한 처지긴 해도 봇짐장수(褓商)들은 한결 형편이 낫다.

이들은 나름대로 조직을 갖추고 있는 데다 비교적 값비싼 금은 세공품을 많이 판다.

올해 45세인 김말동씨는 처자식을 볼 기회가 많지 않다.

한 달에 한 번쯤 경기도에 있는 자기 집에 들리지만, 두 달 넘게 집에 못 가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전국 각지를 떠돌다 보니 몸이 많이 상했다.

아파도 쉴 곳이 없고, 주린 배를 채울 곳도 마땅치 않다

군데군데 주막이 들어섰지만 아직 주막은 많이 부족하다.

주막이 없어 산길에서 밤을 새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이곳저곳 낯선 지방을 돌아다니다 보니 텃세를 부리는 무뢰배들을 만나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무뢰배 말고도 김씨 같은 상인을 괴롭히는 자들은 많다.

큰 장사치들이 장시의 유통을 독점해 장사를 방해한다.

어떤 장시에서는 큰 장사꾼들의 사주를 받은 관리들이 심하게 단속해 난전을 펴 보지도 못하고 쫓겨난다.

충청도의 한 장터에서는 실컷 두들겨 맞고 옹기를 몽땅 빼앗기기도 했다.

게다가 큰 장사치들은 숙박업과 위탁업 등을 겸업하거나 권력층과 결탁해 포구나 장시의 유통을 독점하기도 한다.

이들 뒤에는 또 사당패들이 따라 다니고 있어 손님을 끌어 모으는데도 한몫을 단단히 한다.

김씨는 원래 농민이었다.

직접 면포를 짜서 자기 마을에서 30여리 떨어진 시장을 오가며 팔았다

농사보다 장사가 수입이 높은데다 시장을 자주 오가다 보니 농사 지을 시간과 면포를 짤 시간이 부족해 아예 농사를 그만 두었다.

"장시마다 열리는 날짜가 다릅니다.

어떤 곳은 15일 간격, 어떤 곳은 10일 간격, 또 어떤 곳은 5일 간격으로 열립니다.

그러니 장이 열리는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게 된 것이지요." 김씨는 산에서 도적을 만난 적도 있었다.

지난 여름 충청도 청주에서 경상도 상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산적을 만났던 것이다.

옹이 판 돈과 남은 옹이를 몽땅 빼앗겼다.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김씨의 동료 장씨는 처자식을 모두 데리고 다닌다.

평양이 고향인 그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없는 데다 가족들이 보고 싶어 험한 길이지만 함께 다닌다고 했다.

장씨는 무쇠그릇과 대나무 제품, 나무제품을 주로 판다.

함께 다니는 천씨는 어물과 소금을 판매하고 있다.

대상들의 비단, 가죽제품, 종이에 비하면 모두 값싼 제품들이다.

김씨와 동료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전국을 떠돌고 있다.

아침에 동쪽 하늘이 벌겋게 밝아질 무렵 주막을 나서 한밤이 될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몸이 아플 때 가장 힘들다.

약을 구하기 어렵고, 쉴 만한 곳을 찾기도 힘들다.

혼자 다니는 장사꾼 중에는 죽은 지 며칠이 지나 길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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