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집 떠나 산으로 피신
1660년에서 1864년 사이 사망자가 많이 발생한 역병은 모두 79차례였다.
이 중에는 10만명 이상 죽은 경우도 6차례나 된다.
어떤 해에는 50만명 이상이 죽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밝히고 있다.
조선 후기 역병은 주로 콜레라, 천연두, 성홍열,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이었다.
이 가운데 피해가 가장 컸던 것은 콜레라와 천연두였다.
역병이 창궐하는 현장을 둘러보았다.
콜레라가 번진 경기도의 한 농촌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주민의 90% 이상이 집을 버리고 떠났다.
전염병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망뿐이었다.
보따리를 이고 지고 떠나는 사람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사람이 사람 보기를 귀신 보듯 했다.
사람들은 모여 살았지만 역병이 번지기 시작하면 흩어졌다.
이웃은 단지 전염병을 옮기는 악귀일 뿐이었다.
마을을 떠난 사람들은 인적이 드문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사람들이 산으로 몰려들면서 푸르러야 할 소나무는 누렇게 시들었다.
굶주린 사람들이 소나무를 베어 껍질을 벗겨 먹고 솔잎을 따먹었다.
서울 주변 산은 홍수를 막기 위해 벌목이 금지돼 있었다.
그러나 굶주린 사람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엄격한 처벌방침을 밝혀온 한성부도 어쩌지 못했다.
역병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무시무시한 일이다.
약은 근본적인 치료방법이 되지 못했고 최후의 순간을 조금 늦추는 정도에 불과했다
독은 단번에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인체기관을 정지시켰다.
환자는 끔찍한 경련과 함께 근육이 마비됐다.
맥박이 가늘어졌고 정신을 잃었으며 사지는 차가워졌다.
예비 증상 없이 급사하는 사람도 많았다.
서울에 역병이 돌자 한성부는 환자나 주검을 성밖으로 격리했다.
혜민서나 광희문과 소의문(서소문) 밖 두 곳에 설치된 동서활인서에서 역병관리를 맡았다.
그러나 이들 기관은 병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주는 것이 주 임무였다.
뾰족한 치료법은 없었다.
게다가 의관들은 태만했다.
약을 횡령하기 일쑤였고 제 때에 약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서울의 한 진제소(賑濟所)를 찾은 굶주린 사람은 하루 1만여명이 넘었다.
개설 첫날 이 진제소를 찾은 자는 6천여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자 각지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죽을 끓이기 위해 큰솥 40개를 걸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죽을 끓였지만 부족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에게는 마른 양식을 특별히 내리겠다고 했지만 돌아가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끝내 죽 한 사발을 얻지 못하고 돌아서던 노인이 쓰러졌다.
재빠르게 두 그릇, 세 그릇을 얻어먹는 자도 있었다.
죽 솥을 향해 몰려든 사람들은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이리떼와 같았다.
한 노파가 죽을 얻어먹기 위해 다투다가 넘어졌다.
그는 사람들에게 밟혀 죽었다.
사람들은 진제소 주변 길바닥에서 밤낮을 보냈다.
악한 기운이 더운 공기를 타고 빠르게 퍼졌다.
쓰러진 자는 신음하다 죽었다.
병자를 돌보는 사람은 없었다.
죽은 자는 수레에 실려 나갔다.
수레에 실려 나간 자 중에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살아 있음을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진제소에서 배급하는 죽은 하루에 어른 2홉 5작, 어린아이는 2홉이었다.
역병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역병에 걸려 죽은 자를 성밖에 내다버리는 것이 역병 확산 방지에 도움이 된다는 정도만 알뿐이었다.
역병은 극복할 수 없는 하늘의 재앙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굿을 하거나 도망치는 것 외에 달리 취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역병은 역신이 붙은 것으로 파악될 뿐이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역병 퇴치법은 귀신을 겁주어 쫓아내는 방법, 살살 달래서 풀어주는 방법, 더 뛰어난 신령의 도움으로 역귀로부터 벗어나는 방법들이었다.
축귀(逐鬼·귀신을 쫓아냄)에는 복숭아 나뭇가지로 때리거나 불이 이용됐다.
원혼을 달래 풀어주기 위해 각종 굿이나 여제(輿祭)가 시행됐다.
더 큰 정령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장승을 세우거나 산천이나 성황 등에 비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여제를 행할 여제단이 북한산에 상설로 설치됐다.
역병 예방을 위해 청명, 7월 보름, 11월 초하루에 제사를 지냈다.
전국의 각지에도 임시로 여제단이 설치됐다.
중앙에는 여제를 지내는 제관이 따로 있었다.
역병의 유행과 그 정도에 따라 제관의 등급이 달랐다.
지방에서는 주로 그 지역 수령이 제사를 지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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