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데스크-그리움이 그립다

입력 2004-09-03 14:19:06

9월이다.

일상에서 훌쩍 벗어나고픈 유혹이 잦은 계절이다.

그래서인지 잠시라도 갑갑한 세상에서 비켜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잠깐 짬을 내 하늘을 한번 쳐다보자. 땅에서는 싸움질로 밤낮이 없지만 하늘에서의 변화는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고 있다.

가을이다.

나날이 파래지고 높아지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노라면 땅위의 일들이 오히려 가볍다.

최근 세상을 떠난 미국의 죽음 연구가이자 정신과 전문의 퀴블러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간다"고. 언뜻 소풍을 끝내고 돌아간다는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을 떠올리는 이 말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도 가을하늘이 주는 선물이다.

그냥 먼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눈이 아스라해지고 가슴이 저려온다.

'그리움'이다.

◇ 가을이 가져다 주는 선물

아침 저녁으로 가을임을 느낄 때면 참으로 그리움이란 단어를 잊은 채 살고 있음을 문득 느낀다.

인터넷이다 휴대폰이다 해서 생각나면 바로 연결되는 즉시(卽時)의 세상에 살면서 어느덧 그리움이란 숙성 과정 없이 날것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뭐든지 생생한 것, 날것들을 선호하는 세상으로 바뀌면서 애태우며 서서히 익히는 그리움의 과정이 사라진 것이다.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면 바로 휴대전화나 문자 메시지로, 혹은 e메일로 날린다.

언제 어디서나 생각나면 바로 부르고 소통이 가능하다.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잡을 틈이 없다.

생각나면 날것으로 바로 연결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익을 시간도 익을 여유도 없다.

그러나 밤새 쓴 편지를 차마 부치지 못한 사람이나 눈물이 번진 편지를 받아본 사람은 안다.

그리움도 자란다는 것을, 그리고 익는다는 것을.

한달 전 의식을 잃고 지금도 병원에 있는 김춘수 시인. 기도 폐색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도 '그리움' 이었다.

혹시 사무치는 그리움이 몸을 상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끔 전화통화할 때면 그의 목소리는 늘 사람에 목말라 있었다.

수화기를 통해 전달되는 반가움에 겨운 목소리는 분명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경기도 분당에서 혼자 살던 시인과의 전화통화는 늘 안쓰러웠다.

젊은 시절 대학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사정없이 무안을 주던 꼬장꼬장함과 학생들의 무식함을 비웃던 그 오만함은 간데 없고 외로움만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노 시인은 정말 시가 잘 써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한 달에 7, 8편의 시를 썼다.

사무치는 그리움이 시로 쏟아져 나온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나이 40을 넘긴 이들은 젊은 시절 가을이면 그리움으로 시인이 됐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시인을 닮아 있었다.

낙엽을 보면서 사라짐을, 파란 하늘을 보면서 사랑을, 편지를 쓰면서 그리움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움이라는 단어는 가볍지 않고 즉흥적이지 않다.

거의 같은 시간대에 눈과 귀로 바로 소통되는 기계에 매몰돼 있는 이들은 그리움이 주는 깊이와 여유를 알지 못한다.

컴퓨터 화면 속에 진실이 있고 거기에 효율적인 삶의 방식이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그리움이 자리잡을 공간이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그리움이란 더디고 효율적이지 못한 구닥다리들의 감정의 사치쯤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리워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 가슴 울리는 감동 담겼으면

오늘도 여기저기서 사랑이 넘쳐난다.

브라운관에서 컴퓨터화면에서 심지어 노래방에서까지 사랑은 넘쳐난다.

정치인은 국민을 사랑하고 TV는 시청자를 사랑하고 기업은 소비자를 사랑한다고 외친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서일까 그런데도 모두들 외로움과 배신에 치를 떤다.

온통 사랑이 넘쳐나는데 우리는 여전히 외롭다.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가슴에서 익고 마음에서 자라는 그리움 없이 날것으로 사랑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리워 할 줄 모르는 것도 큰 병이라고 했다.

그리움은 사람을 익게 만든다.

그리고 그리움은 생각의 깊이와 행동의 신중함을 가져다 준다.

날것의 세상에 그리움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가을, 헤프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은 그리움이 정말 그립다.

김순재(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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