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어떤 제조업을 살릴 것인가

입력 2004-08-18 11:57:22

홍콩을 거쳐 중국 심천시에서 차량으로 40분 가량 이동하면 공장들이 밀집해있는 보안시가 나온다.

이곳에 아이리버 MP3를 제조하는 공장이 있다.

플래시 타입의 MP3에서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공장이다.

라인으로 들어가면 1천500여명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근로자들이 컨베이어 양쪽으로 도열해 앉아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넓은 작업라인에는 적막이 흐르고, 옆으로 다가가도 힐끗 보는 무표정한 얼굴에 머쓱해진다.

얼굴만 마주쳐도 일단 미소를 지어 보이는 서구화된 홍콩의 직원들에 익숙해있던 나로서는 감정도 없는 듯한 소녀 작업자들이 외계인처럼 어색했지만 연말 송년파티를 할 때 완전히 인식을 바꾸었다.

이들 1천500명의 소녀들도 쾌활하게 떠들며 웃음이 가시지 않고 H.O.T에 열광하고 한국의 스타들을 동경하는 우리나라 소녀들과 똑 같은 '꿈 많은' 소녀들이었다.

단지 다른 점은 중국 내륙의 곳곳에서 며칠씩 걸리는 버스로 내려와 일자리를 찾고 시간외 근무나 휴일근무가 좀 더 많은 곳을 찾아 다니고 이렇게 번 한푼 한푼씩을 저축하여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 보내거나 언젠가 이룰 행복한 '결혼의 꿈'을 새록새록 키워나가는 것이다.

그 꿈을 위해 가장 학습능력이 뛰어나고 손끝의 감각이 예민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황금시절을 이 보안시의 산업전선에 기탁한 것이다.

지난 1970년대를 대학교, 군대, 직장 초년 생활로 보낸 나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이들을 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임금의 격차를 떠나 지금 한국의 생산라인의 인력들이 이들에 비해 얼마나 경쟁력이 있을까? 경쟁력을 떠나서 1년 반 만에 250명의 인력을 1천500명으로 늘리는 것이 한국에서 과연 가능했을까? 갑자기 2배, 3배의 물량을 요구하는 해외 바이어들의 주문을 한국에서 과연 소화해 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지금 한국의 제조업의 공동화를 우려하고 있다.

브랜드가 없는 중소기업일수록 공동화는 더욱 심각하다.

제조업을 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한편으로 청년 실업자들이 힘든 일은 싫어하고 마음에 드는 일만 하려 한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보안시의 소녀들을 닮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비단 우리들 만의 문제인가? 국민소득 1만달러에서 2만달러로 성장한 모든 나라에서 똑같이 겪었던 문제이고 그들이 어떻게 극복했는지 멀리도 아닌 역사책의 바로 한 페이지 앞에 있지 않은가.

MP3의 내구성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바로 조글 스위치라고 부르는 네비게이션 버튼이다.

젊은 고객들이 쉴새 없이 만지작거리기 때문에 쉽게 마모가 된다.

처음에 일본의 유명회사 제품을 사용했지만 불량이 다발했다.

그 회사 측에서는 우리가 제시하는 스팩이 너무 까다롭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불평했다.

디지털 시대의 젊은 문화 코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참에 스위치도 한번 국산화해 보자고 국내 업체를 샅샅이 뒤졌지만 그나마 그만한 품질을 내는 곳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수소문 끝에 프랑스에서 4배의 가격을 주고 수입했다.

프랑스의 한 시골에 있는 작은 중소기업이었다.

그리고 그 땅에 제조업은 살아 있었다.

조글 스위치 하나로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며 국민소득 2만2천달러의 나라 속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제조업을 살리자고 하는 우리의 구호가 자칫 보안시에서나 경쟁력이 있는 제조업까지 포괄하거나 우리 젊은이들에게 보안의 소녀들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이라면 소득 1만달러의 사회적 코드를 읽어 내지 못한 것이다.

무슨 제조업을 살릴 것인가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반드시 와이브로나 위성 DMB일 필요는 없다.

2만달러의 구호 속에 소외되어 있는 작은 제조업들에서 부가 가치의 핵심을 찾으면 된다.

스위치, 금형기술, 새로운 금속 재료, 도장기술 주변에 널려 있는 이런 분야들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도록 투자하고 지원하면 그 하나하나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

그리고 그로부터 탄생되는 휴대전화와 MP3도 세계 최고의 디자인, 품질, 마무리를 자랑하며 외화를 벌어 들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보안시 역사의 바로 앞 페이지를 채워 넣고 있다.양덕준 레인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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