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가야-(39)바다의 신이여

입력 2004-03-29 08:58:39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마을'. 황해안에 말머리 모양으로 툭 튀어나온 변산반도의 서쪽 끝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황해 바다 멀리 위도(蝟島), 비안도(飛雁島),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바라다 보이는 지역이다.

30여 가구의 죽막마을을 낀 이 곳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바람을 막아준다고 '방풍림'으로도 불리는 후박나무가 해안가를 장식하고 있다.

후박나무가 용두산을 감싸도는 2km 구간의 해안절벽이 '적벽강(赤壁江)'. 중국 시인 소동파(1036~1101년)가 서정적인 시를 노래하며 놀았다는 황주의 적벽강에서 따온 이름이다.

물살이 깎아낸 기괴한 암벽과 후박나무, 출렁이는 파도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뤘다.

'전북도 기념물 제29호'(적벽강) 팻말에서 남쪽 해안선으로 1km쯤 떨어진 적벽강 위에 자그마한 목조건물이 세워져 있다.

대나무가 둘러싼 건물 앞쪽은 서편으로 황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다.

나무기둥과 벽 위에 기와를 얹은 이 건물은 바로 황해를 다스리는 개양(수성)할미와 그의 여덟 딸을 모신 제당, '수성당(水城堂)'이다.

황해를 다스리는 여해신(女海神), 개양할미. 키가 워낙 커서 굽나막신을 신었고, 바다를 걸어다녀도 버선목까지 밖에 물이 차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개양할미는 서쪽 바다를 걸어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을 표시하여 고기잡이배나 교역선을 보호했다는 것. 또 고깃배를 인도하고 풍랑을 잘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도 했단다.

예로부터 이 마을 주민들은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수성당에서 풍어(豊漁)와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

항해의 안전이나 고기잡이의 풍년을 바라며 정성을 들인 마을의 공동제사인 셈이다.

그 제사가 1천500년 전 대가야인들의 바닷길에까지 거슬러 올라갔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김재열(67)씨는 "주민들은 전설상의 인물 이상으로 개양할미를 믿고 있다"며 "고기잡이가 여의치 않아 수년 동안 중단했다가 지난해부터 다시 마을 공동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수성당 안에는 개양할미와 여덟 딸의 초상이 벽에 걸려 있었다.

또 주변에 오색천이 널려 있고, 앞쪽 절벽에는 초가 군데군데 붙어 있어 제사를 지낸 흔적이 뚜렷했다.

수성당 뒤편에는 소나무 서너 그루가 서 있고, 가로 13m×세로 8m 규모의 공터가 형성돼 있었다.

지난 91년 국립 전주박물관이 바로 이 공터 주변을 발굴한 결과 방대한 양의 유물이 나왔다.

토기, 금속유물, 흙이나 돌로 만든 모조품, 중국 도자기 등이 쏟아졌다.

삼국시대를 전후한 시기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제를 지낸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제사유적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국립중앙박물관 유병하 학예연구사는 "토기는 주로 400년대와 500년대 만든 것으로, 전체적으로는 200년대 후반부터 600년대 전반까지 축적된 것"이라고 말했다.

토기는 백제 양식이 주류를 이루면서 그릇받침(器臺), 아가리 넓은 항아리(廣口壺), 큰 독(大甕) 등 대가야 또는 왜(倭)계 양식도 상당수 출토됐다.

중국 도자기는 대다수 남조시대(317~581년)의 것이다.

대가야가 479년 제나라(薺;479~502년)에 사신을 파견하며 교류하던 시기도 남조(南朝)시대였다.

400년대 후반에서 500년대 전반의 큰 독(大甕) 안에 든 채로 출토된 쇠창(鐵 ), 말 안장다리(鞍橋), 말띠드리개(杏葉), 구리 및 쇠 방울(銅.鐵鈴) 등 금속유물 대다수는 대가야 계통이다.

특히 검릉(劍菱)형 말띠드리개는 고령 지산동 44호, 합천 옥전 M3호 무덤 등에만 나오고, 대패(鐵 )모양 철기도 옥전 M3호 무덤의 그것과 유사한 대가야 유물이다.

이 같은 출토품은 주로 중국 남조, 백제, 대가야, 왜 등이 정치, 경제, 문화적 욕구에 의해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시점의 문물이다.

결국 수성당을 배경으로 한 '죽막동 제사유적'은 대가야와 왜, 백제가 중국과의 교통루트 확보 및 교역을 위해 바닷길을 뚫는 과정에서 제를 올리며 항해의 안전을 빌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을까.

400년대 후반, 대가야나 백제, 왜는 넓은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술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연안을 따라 배를 몰면서 해안에 돌출하고 주변에 표식으로 삼을 만한 산이 있던 수성당 주변이 항해상의 주요 기점이 됐던 것. 백제가 도읍지,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들어가는 금강(錦江) 입구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더욱이 인근 바다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연안반류(沿岸反流), 빠른 조류와 강풍, 주변 섬들로 인한 복잡한 물길 등으로 항해의 위험이 큰 곳이다.

지난 93년 10월 서해 페리호가 가라앉아, 승객 292명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당시 페리호는 위도의 파장금항을 출발해 수성당 옆 격포항으로 향하다 거센 풍랑을 만나 출발 20여분만에 침몰한 것. 대가야는 옛날 백제와 중국으로 향하던 중 이처럼 파고가 높고 바람이 거센 지역에서 바다의 신에게 안전한 항해를 기원했던 것이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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