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후 3시30분. 한 무리가 출근하고 이어 퇴근하는 근로자들로 기숙사 앞마당은 왁자했다.
그리고 그 시각에도 또 다른 한 무리들은 숙소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오전 6시20분에 출근해 낮 근무를 마친 근로자들이 막 퇴근버스에서 내려 기숙사로 향하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이들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또 한무리의 근로자들이 출근을 마친 시각이었다.
단지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생활을 강요 받았던 대학 기숙사와 군 내무반 생활을 기억하며 찾았던 LG필립스LCD 석적 중리 기숙사. 정문에 들어서면서 이내 화석처럼 굳어졌던 집단생활에 대한 생각이 무너짐을 느꼈다.
이들의 첫인상에서 당당함과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LG필립스LCD 공장이 1년내내 현장 작업등이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숙사에서 새삼 느낀다.
이 곳의 젊은 근로자들도 서로의 빈자리를 메워가며 24시간을 깨어 있다.
휴게실에서 편안히 TV를 보기도 하고 헬스나 스쿼시로 흠뻑 땀에 젖어 재충전하기도 한다.
노래방과 PC방에서 한바탕 즐기고 나면 그들에게 기숙사는 세상의 전부가 된다.
아침 출근, 저녁 퇴근이라는 일상부터가 다르다.
하루 3교대 근무로 이른 아침부터 밤 늦은 시간까지 출근과 퇴근 발길이 엇갈린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과 작업속에 그들은 무얼 고민하고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일까?
패널 4공장 검사부에서 일하고 있는 김영혜(20.입사 2년차)씨는 퇴근 차량에서 내리자마자 총총걸음으로 3층 숙소로 향한다.
오늘은 며칠간 미뤄놓았던 빨랫감들을 세탁해야 하기 때문. 김씨는 입사하면서 나름대로 각오했던 목표가 있어 남들보다 시간을 쪼개 바쁘게 살아간다.
잠시라도 한 눈을 팔다보면 빨랫감들이 방 구석에 수북이 쌓이기 일쑤다.
세탁기에 옷을 구겨넣고 곧바로 헬스장으로 향한다.
중무장한 방진복장에다 종일 두 다리로 서서 완제품 검사에 온 신경을 쏟아 붓고 나면 이내 녹초가 돼 버리기 마련. 하지만 김씨는 꾸준한 건강관리로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 거뜬히 견뎌내고 있다.
"사실 현장의 단조롭고 반복되는 작업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정신이나 육체적 건강이 최고죠". 김영혜씨는 "기숙사는 이제 잠자고 먹는 곳이기보다 정신건강과 체력유지에 필수적인 문화 요소들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김씨가 퇴근 후에 매일 찾는 곳이 바로 헬스장이다.
특히 그녀에게 PC방이나 노래방 등은 좋은 친구가 된다.
가족들에게 e메일로 편지를 보내고 동료들과 노래방에서 한바탕 소리지르며 노래를 부르고 뛰고 나면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가신다.
그녀에게 기숙사는 바깥 세상을 찾지 않고도 문화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된 것.
LG필립스LCD는 1천900여명이 함께하는 이 곳 중리기숙사를 비롯해 동락원, 그리고 진평.옥계 등지에 미혼 근로자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두고 있다.
모두 4천700여명의 남.여 근로자들이 새로운 생산성 혁신을 위해 고단한 몸을 뉘고 각종 문화.복지시설을 통해 건강과 활력을 유지해 간다.
지난 2000년에 입주한 중리기숙사는 단순한 숙식의 장을 넘어 집단문화시설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곳에는 노래방.PC방.탁구장.당구장.스쿼시 시설을 비롯해 30여명이 동시에 운동할 수 있는 헬스장까지 갖추고 있다.
게다가 분식점과 호프점 등 먹을거리 시설은 물론 세탁소.미용실 등 편의시설도 완벽하다.
올 해로 기숙사 사감생활만 19년을 해 온 김은자(49)씨는 "먹고 자는 것만 해결했던 옛 기숙사와는 엄청나게 달라졌다"며 "이젠 의.식.주에 앞서 다양한 젊음이 요구하는 문화욕구를 충족시키는 시설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대기업은 물론 구미공단의 500여 중소기업체들도 가장 우선하는 사원복지 시설을 기숙사로 손꼽고 있다.
그만큼 고된 작업장의 짐을 훌훌 털고 내일의 재충전을 위해서는 '건강'과 '활력'넘치는 그들만의 보금자리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구미공단 수출 200억달러는 12만 근로자들의 손끝에서 이뤄졌다.
그 중에서 삼성전자 1, 2공장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5천여명의 근로자와 LG필립스LCD, LG전자, LG디스플레이 등 주력기업은 룰론 120여개 협력업체들이 신.증축한 기숙사들이 곧 수출신화의 또 다른 현장인 셈이다.
"기숙사는 내 젊음의 반쪽이예요. 이 곳에서 건강을 챙기고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문화욕구를 충족시켜 나가죠. 그러니까 기숙사는 늘 깨어있는 또 하나의 현장인 셈이지요". 기숙사생의 말에서 구미공단 수출 저력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구미.엄재진기자 2000ji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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