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입학부터 고교 3학년까지 12년을 대학입시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달리게 만드는 우리 교육. 그 때문일까. 수능을 마친 고3 교실은 종착역에 도착한 기관차처럼 잠시 숨을 헐떡거리다가 금세 식어버린 모습이다.
수능 이후 겨울방학 때까지 고3생들에게 남은 일이라곤 수능 성적표를 받아 대학에 원서를 내는 것 뿐. 수십년 동안 대학입시제도를 운영하면서도 학교든 사회든 이들에게 제대로 된 휴식의 시간이나 대학 진학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은 여직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는 겨울방학이 예년보다 열흘이상 늦어져 학교로서는 '어떻게 학생들을 잡아둘 것인가' 고심하는 상황이다.
▲출석 체크하러 오는 학교
"학교요? 오라니까 그냥 오는 거죠. 집에 있어 봐야 할 일도 없으니 친구들과 대충 시간 때우다 가는 거죠".
25일 오전 10시쯤 대구의 한 고교 3학년 교실. 겨우 몇 명의 학생들만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보니 소설책을 읽거나 운전면허 문제지를 풀고 있었다.
한 학생이 "안보교육 한다고 해서 모두들 강당으로 갔다"고 했다.
강당에는 400여명의 고3 학생들이 외부강사의 강연을 듣고 있었다.
주제는 '통일안보'교육. 몇몇 학생은 의자에 기대고 잠을 청하거나 신문, 만화책 등을 들춰보고 있었다.
수군거리던 학생들은 교사들이 얼굴을 찡그리자 그제서야 강사에게 눈길을 줬다.
"지루하죠. 이런 걸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오전에는 교양 강좌, 오후에는 비디오 상영이 요즘 학교생활인데 이럴 거면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나 하는 게 낫죠".
요즘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고3생들의 풍경이다.
수능시험에 이어 학기말 시험까지 끝나자 더 이상 교과 수업은 이뤄지지 않는다고 교사들은 말했다.
바쁜 학생이라고 해야 논술이나 면접을 준비하는 일부와 예.체능 실기시험을 준비하는 몇몇. 대부분의 학생들은 출석 확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등교하지만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몸살을 앓는다.
▲바쁜 교사들, 교육부는 엄포만
교사들은 학생부 입력 마무리, 기말시험 성적 처리, 정시모집 진학 지도 등에 쫓겨 수업 공백을 메울 만한 별도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가 힘든 실정. 그렇다고 수업을 대체할 만한 학교 밖 문화활동 기회도 그리 많지 않다.
결국 수능 이후 두달 이상을 외부 강연이나 듣고 비디오를 보면서 보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한 교사는 "교과 과정을 마친 학생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지, 또 가르친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교육적 효과가 있을지 의문스럽다"고 했다.
매년 되풀이되는 고민이지만 올해는 겨울방학이 10여일 더 늦춰지는 바람에 학생지도에 더욱 애를 먹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수능 직후 시.도 교육청을 통해 단축수업이나 편법 출결처리 등 교육과정을 파행 운영하는 학교는 그냥 두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려보내 교사들로부터 불만을 사고 있다.
학교 현장 분위기를 모르는 탁상행정이라는 것. 한 고교 교감은 "대학입시를 최종 목표로 할 수밖에 없는 고3 교육 현실은 방치한 채 수능 후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행하라는 것은 여론의 질타를 회피하려는 면피용 정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특별 프로그램도 일회성
물론 고3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자체나 시민.사회단체들이 학교와 연계해 사회적응 프로그램 등 여러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해 두고 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들은 기회가 한정돼 있어 모든 고3 수험생들을 수용하기란 역부족이다.
또 대부분의 행사가 일회성으로 그치고 있어 대학생활이나 사회생활에 필요한 소양을 길러주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각 학교에서는 지난해까지 지원되던 특별 프로그램 운영비마저 끊겨 외부 프로그램 유치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털어놨다.
일부 학교에서는 동창들에게 강연을 부탁하는 등 묘안을 찾고 있지만 실속 있는 프로그램을 몇 차례 진행하기에도 버거운 실정이다.
▲학생들이 원하는 프로그램 찾아야
류명환 대구고 3학년 부장은 "단위 학교에서 짜여진 고3생 지도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데다 행사 위주로 꾸려지다 보니 학생들의 호응을 얻기는 무리"라며 "교육부 차원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학교 관계자들은 또 교양강좌 강사를 파견하거나 강사비를 보조해주는 등 막무가내식 지침이 아니라 실질적인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했다.
학생들은 또다른 측면에서 불만을 털어놨다.
ㄷ고 김모군은 "지금까지 우리는 시키면 따라야 하는 노비처럼 지내왔다"며 "이 시기만이라도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지 귀 기울이고 우리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다른 학생은 "학교측이 지금까지 수능 성적 올리기에 쏟아온 열정의 반이라도 남은 기간에 관심을 기울여줄 수는 없는지 답답하다"고 했다.
내년 2월 중순쯤이면 일부 학교 교문 앞에는 명문대 진학자 명단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내걸릴 것이다.
하지만 몇 명을 어느 대학에 보내느냐가 아니라 대학이나 사회에 진출하는 학생들에게 마지막까지 우리는 이처럼 최선을 다했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학교로 만드는 것, 그것이 공교육의 올바른 길이 아닐까. 글:최두성기자 dschoi@imaeil.com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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