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송두율씨 경우

입력 2003-10-22 09:11:00

경계인이라는 애매모호한 용어를 들고 독일에서 귀국한 송두율씨의 문제는 우리나라가 얼마나 허약한 체제인가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한다.

사실 송두율씨 한사람을 어떻게 처리하건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가 지난 시대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고 정리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기에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다.

반만년 우리 역사의 질곡은 수많은 지식인을 희생시켜왔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일제강점기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황국신민으로 자부하며 반민족적 만행의 선두에 서기도 하였으며 군사정권 시절에도 그 역사는 이어져 왔다.

그것은 지식인들의 나약함과 비겁함까지를 드러내는 비극적 현실인 것이다.

80년대 대학을 다니며 동료들이 민주화운동에 나설 때 도서관에서 이를 악물고 고시공부를 했던 나로서는 그들의 비극 앞에 아무런 할 말이 없다.

더 나약하고 더 비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이 있기 때문이다.

송두율씨의 경우 경계인이라는 애매모호한 용어를 써가며 이중삼중의 변절을 예쁘게 분장하여 영웅으로 돌아오고자 했다.

그가 만일 분단시대를 겪고 있는 나약하고 지친 지식인으로서, 이제 또다시 전향을 하는 괴로움을 가슴에 안고 돌아왔다면 그는 우리사회의 '성숙한 포용'을 한몸에 안고 고향땅에서 안식처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러 날이 되도록 말을 바꾸며 경계선을 오가는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점에서 그는 여전히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역겨운 경계인인 것 같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것은 다른 곳에 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온통 그에게 애원하듯이 반성을 하라고 사정하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용서해 줄테니 제발 반성을 해 다오. 관용을 베풀테니 전향을 해 다오'하는 식이다.

어린 아이를 달래더라도 매부터 들어야 한다.

그런데 나라의 앞날을 가름할 중차대한 문제를 이렇게 처리해서야 되겠는가. 언제까지 우리가 이런 식으로 애걸복걸해야 하는지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김재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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