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나면 산길을 걷는다.
산길을 걷다 보면 낙엽이 제법 쌓여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훤하다.
여름 하늘보다 훨씬 높고 넓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산 전체가 훤하다.
길가에 쌓여있는 낙엽에 눈길이 간다.
바싹 마른 잎새가 작은 바람에도 금방 휩쓸려 갈 것 같다.
낙엽은 가을의 상징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는 가을이면 높푸른 하늘과 탐스럽게 익은 과일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 왔다.
낙엽은 염두에 두지 않고 가을을 결실의 계절, 수확의 계절로만 바라보려 한 것이다.
남보다 더 큰 과일, 남보다 더 많은 과일을 얻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라는 인식이 보편적 가치가 되면서 더욱 그런 쪽으로 가을을 생각하게 했던 것이다.
실제 우리는 이런 가치관에 별다른 회의를 품은 적이 없었다.
남보다 더 많은 과일을 얻는 사람이 곧 능력 있는 사람이라 하였고 그런 사람이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 주역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더 많은 과일을 얻기 위해 편법과 비정함이 정당화되는 것에 애써 눈감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 오랫동안 맺은 인연을 거침없이 뿌리치고 '나'를 주장하기 위해 남의 가슴에 씻지 못할 상처 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지난 날이 아니었던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철벽을 쌓고 남의 것은 끊임없이 탐내며 자기 것은 나눠 줄 마음이 없는 옹졸한 삶을 오히려 알뜰함으로 치장하지 않았던가. 남이 조금이라도 더 가지면 시기하고 배척하는 것을 때로는 승부근성이라며 자랑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하는 일은 언제나 의미 있는 일이라 떠벌리지만 남이 하는 일은 쓸데없는 일로 매도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한 이웃이 어린 자녀들과 아파트 옥상에 몸을 던지고 가정 주부가 은행 강도가 되었을 때,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을 바라보듯 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행복하게 생각하지나 않았던가. 더 많은 과일, 더 큰 과일에 집착하면 할수록 우리가 만나는 것은 허기일 뿐이다.
이 끝없는 허기는 마침내 우리 자신을 파괴할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 우리의 허기가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 가을, 점차 잊혀져 가는 낙엽의 상징적 의미를 떠올려야 한다.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낙엽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들이 마른 몸을 비비며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문득 '허무하다'라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낙엽 하나 들고 그 허무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리라. 그리고 우리 내부에 깊이 잠들어 있던 허무의식을 깨워야 한다.
허무와 마주서서 자신을 보아야 한다.
이것은 좌절이나 절망의 수렁 속으로 몸을 던지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동안 추구해왔던 과일은 결코 씨앗,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는 것이며 과육의 달콤함에 마비되어 있던 우리의 본성을 되찾자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낙엽처럼 바람에 휩쓸려 이승을 떠나는 때가 있다','내가 누리고 있는 이 높은 자리도 언젠가는 내려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눈뜬 허무의식이 일깨워 주리라. 그러면'내가 가진 과일', '내가 가진 자리'그것이 허무, 그 자체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은 조금씩 수정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다시 무엇이 '참된 삶'인가에 대한 고뇌가 시작되리라. 가을 산길을 걸으면 문득 가을 산에는 향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후각을 가다듬으면 가을 산의 향기는 아주 진하게 느껴진다.
낙엽이나 일년생 풀잎들이 시들어가며 내뿜는 향기로움이다.
쌓인 낙엽들이 발효되면서 풍기는 냄새인 것이다.
낙엽이 거름으로 익는 과정이다.
거름으로 거듭나는 낙엽, 결코 절망적인 허무가 아니라 차라리 새로운 생명잉태의 상징이 아닌가. 돌아오는 봄에는 그 거름 위에서 새로운 풀잎이 자라날 것이다.
온몸을 던져 남의 생명을 살리는 거름이 되는 낙엽 한 잎의 삶 앞에서 마냥 부끄러워질 뿐이다.
구석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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