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고령군 고령읍 연조리 고령초교 운동장 입구, 자그마한 우물 하나. 실개천의 올챙이들이 떼지어 헤엄치듯 예닐곱 동심들이 마냥 즐겁게 뒹굴었다.
한 아이는 우물가에 쪼그려 앉아 주전자에 연신 물을 퍼담았다.
그 물은 아이들의 손에서 흙으로 흘러내려 동그라미, 네모, 세모로 변했고, 곧이어 정겨운 놀이터가 됐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우물. 천년을 거슬러 마르지 않고 있는 우물이었다.
기나긴 역사의 사연도 모른 채 뛰노는 아이들 곁에서 물은 그렇게 소리없이, 변함없이 솟아나고 있었다.
왕의 목을 적셨던 물이었다.
이름하여 '어정(御井)'.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령현의 남쪽 1리에 대가야국의 궁궐터가 있고, 그 옆 돌우물을 어정이라 전한다'는 기록이 있다.
1977년, 이 우물의 밑바닥에서는 대가야 양식 목긴 항아리와 목짧은 항아리, 적갈색 연질토기, 그릇 손잡이 등이 나왔다.
우물 구조물은 대부분 부서진 상태로 밑바닥 일부분만 남아있었다.
돌 벽체는 대가야 시대의 것이었다.
축대 틈에 큰 옹기조각이 끼여 있는 것으로 봐 조선시대 개축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생활용기인 적갈색 연질토기는 당시 주거지 터가 인근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발굴 주체인 계명대박물관은 내다봤다.
그렇다면 어정 옆 대가야 궁궐은 어디에 있었을까. '어정지'로 전해지는 이 우물에서 남쪽으로 500m쯤 떨어진 고령향교 옆에는 '연조리 성지'를 표시한 비석이 있다.
지산동고분군과 주산성이 있는 주산(321m)의 동쪽 산기슭에서 고령읍내로 향해 돌출한 작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는 곳. 동쪽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회천을 사이에 두고 대구에서 고령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금산(286m)을 마주보고 있었다.
특히 높이 5m 가량의 축대(둘레 550m)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왕궁터일 가능성이 짙었다.
일제시대인 1910년 세키노타다시(關野貞)가 이 주변을 조사해 삼국시대 기와조각 등을 출토한 이후 대가야 왕궁터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고적도보' 3권에는 1910년대 고령 향교주변의 '대가야 왕궁터'를 배경으로 한 사진과 이 터에서 나온 기와 사진 등을 싣고 있다.
민둥산인 주산과 향교건물 옆 나무 서너 그루, 그리고 집은 보이지 않고 논밭만 펼쳐진 전경 등이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했다.
'연조리 성지'를 표시한 비석자리엔 당시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가 직접 쓴 '임나대가야국성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1986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진 이 비석에는 '임나' '남차랑' 등 글자를 지운 흔적이 있다.
일제 지배와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대가야 후손들의 분노와 거부감이 반영됐을 터.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2000년, 경북대박물관이 축대 주변을 다시 발굴해 부뚜막 2기와 대형 건물터, 500년 전후시기 사발모양 그릇받침, 접시 뚜껑 등을 발견했다.
그러나 대가야 왕궁터를 입증하는 결정적 자료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향후 추가 발굴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었다.
여하튼 신라가 대가야를 공격할 때 '전단량'이란 성문으로 들어갔다는 '삼국사기'의 내용 등 여러 정황으로 봐 대가야 왕궁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 터는 고령향교 주변일 가능성이 가장 높고, '어정지'로 전해지는 고령초교 일대와 고령향교 서편의 주산 동쪽 기슭 등도 왕궁터일 가능성이 있는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그렇다면 대가야 왕궁은 언제 세워졌을까.
기원 직후부터 200년대까지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반운리 일대를 정치적 중심터(국읍)로 삼은 '반로국(半路國)'. 대가야의 전신, 반로국은 남동쪽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회천 유역을 중심으로 주변 가천, 야천, 낙동강 유역과 내륙분지 등 5~6개 읍락을 아울러 소국을 이뤘다.
반로국은 30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치 지배력을 키우고 전쟁 등에 대비하기 위해 회천 유역보다 더 넓고 방어에도 유리한 주산 아래 구릉지(연조리)로 국읍을 옮겼다.
이후 지리적 이점을 살려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이를 바탕으로 야천을 따라 경남 합천군 야로면, 가야면 일대로 영역을 넓혔다.
야로 철산지를 확보, 철제 농기구와 무기 등의 교역을 통해 강력한 힘을 얻게 된 것. 또 고령읍 내곡리에 요지를 만들어 대가야식 토기생산에 본격 나섰다.
농업생산력과 방어력, 철기를 통한 무력과 경제력을 고루 갖춘 삼한 소국단계의 반로국은 질적 변화를 거쳐 '가라국(加羅國)'으로 거듭났다.
왕궁을 세웠음직한 시기였다.
왕궁은 당시 왕의 존재여부와 결부시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언급된 대가야 1대 '이진아시(뇌질주일)왕'의 경우 재위기간이 불명확하고 신화적 요소도 강하다.
이 외에 가장 이른 시기에 '왕'의 칭호가 문헌에 나타난 것은 300년대 후반. 대가야와 신라 사이의 전쟁관련 기록이 실린 '일본서기' 신공기 62년조(382년)에는 '가라국왕 기본(己本) 한기(旱岐)'란 글귀가 나온다.
소국의 수장을 뜻하는 한기와 함께 가라국의 '기본왕'이 등장하고 있으나 일본서기의 가야관련 내용중 덧칠한 부분이 많아 전적으로 믿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존재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왕은 5세기 후반, '하지왕'이다.
이 왕은 479년 중국 남제에 단독으로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이란 작호를 받아 대가야의 위상을 국내외에 드높였다.
대가야는 늦어도 479년 이전에는 왕궁을 조성했다는 것.
결국 대가야는 고령 연조리로 국읍을 옮긴 300년대부터 국제무대에 공식 등장한 479년 사이에 지산동고분군과 주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곳에 궁궐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사진:주산에서 고령읍내로 향해 내려온 작은 구릉에 '대가야국성지'라 적힌 비석이 있다. 이곳 언덕 주변은 높이 5m 가량의 축대로 둘러 싸여져 있고, 가야시대 집터가 발견돼 학계에서는 궁성터일 가능성이 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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