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인간의 가치

입력 2003-09-24 09:35:44

복잡한 도심에서 살다가 팔공산 자락에 있는 마을에서 살게 된 것을 정말 행복하게 느끼고 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푸른 숲과 맑은 공기가 반겨준다.

아파트 주위에 푸른 광경들을 집 안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산책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질 정도이다.

그런데 집 밖을 나가면 신선한 초록이 눈앞에 놓여있고 상큼한 공기를 느낄 수 있지만, 발로 걸어 다닐 만한 '길'이 없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길'이 나 있어야 한다.

물론 아파트 주위에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차가 다니는 길은 있어도 사람이 다니는 길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니 주변에 펼쳐진 대자연의 선물도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에서 지낼 때,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길'이다.

고속도로가 아니라면 인도는 늘 마련되어 있다.

인도는 자전거와 사람이 다니는 길로 나누어져있고, 대개 자전거 전용도로가 구분되어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사람과 자전거가 부딪치는 상황이면 사람을 우선으로 여기고 자전거가 비켜준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에 사람이 서있으면 자동차는 무조건 양보한다.

자전거나 자동차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이 쓰기 위한 도구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므로 수단으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 생각난다.

인간은 존엄하다.

자전거나 자동차와는 가치비교가 이루어질 수 없는 존재이다.

이렇게 가장 소중히 여겨져야 할 인간이 자동차보다 못한 존재인가? 눈앞에 펼쳐진 수려한 자연의 숲을 거닐 수 있는 길이 없고, 시원하게 닦여 있는 자동차 도로 한 쪽에 마련된 비좁은 인도는 인색해 보인다.

문제는 자동차도, 도로도 모두 사람들이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돌보는 일에서 스스로를 제외시킨다.

편리해지기 위해 자동차를 만들고 차도를 닦기는 했지만 자신의 발로 걸어 다닐 길은 정작 없다.

개발, 기술, 첨단 등등. 우리 귀에 늘 맴돌며 신념처럼 자리 잡은 단어들이다.

뭔가 뒤처져 있다는 느낌이 들면서 자신을 잊고 달려가고 있는 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다.

배려, 존중, 상식과 같은 자연스러운 미덕이다.

차도를 멋있게 꾸며주는 가로수가 인도 한복판에 서있어서 휠체어나 유모차가 다닐 수 없다.

파란 신호등이 켜있어도 거리낌 없이 슬금슬금 다가오며 행인들을 위협하는 자동차 운전자가 있다.

산과 개울 사이에 아름다운 정경을 직접 거닐며 감상할 수 있는 산책로가 없다.

논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가는 고단한 농부는 속도를 내며 달리는 자동차들의 눈치를 살피며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을, 나를 배려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원(경북대 인문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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