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휩쓸고간 들녘...분노만 가득

입력 2003-09-17 11:07:14

"농산물 수입 홍수에 태풍 피해까지..."

"논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제 악만 남았습니다". 농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마지못해 복구에 나섰지만 흥이 나지 않는다. 흥은 커녕 아무나 붙잡고 악다구니라도 쓸 만큼 감정은 격앙돼 있다. 산더미 같은 빚은 이미 갚기를 포기했고, 벼와 고추 대신 자갈과 진흙이 가득찬 논밭을 바라보며 내년 농사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다. 곳곳에서 조직적인 반발까지 벌일 조짐이다.

매년 20여ha의 농경지와 가옥이 침수되는 의성군 비안면 이두리와 외곡리. 올해 5차례나 침수피해를 입어 수확은 꿈도 못꾼다. 주민들은 최근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대로는 살 수 없다며 조직적인 대항을 할 태세다. 외곡리 장일환(61) 이장은 "당국이 배수장 건설 등을 운운하지만 제방이라도 쌓았으면 이런 참담한 피해는 없었을 것"이라며 "조만간 농민들의 대규모 저항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의성 구천면 미천제방의 천동배수장이 붕괴되며 일대 논과 과수원은 뻘밭으로 변했다. 과수원을 아예 갈아엎어야 할 지경이다. "올 농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과나무를 모두 캐내야 할 형편입니다". 농민 이철식(63)씨는 천업(天業)인 농사를 그만두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한 심정이다.

박성수(53.청도군 각남면 칠성리)씨는 논 2천평에 심어둔 양파모종을 모조리 망쳤다. 창녕.밀양까지 찾아가 어렵게 구한 모종이었다. 종자를 구할 길이 없어 내년 농사도 포기해야 한다. 농약이며 종자 값은 하루가 멀다하고 치솟는데 대부분 농민들은 금융기관으로부터 찬밥 신세다.

떨어진 과일들은 농민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청송의 경우 떨어진 사과가 무려 6천여t에 이른다. 아직 덜 익은 후지가 70%나 차지한다. 군청이 경북도에 수매를 의뢰했지만 수매계획이 없다는 통보를 받았고, 능금농협도 주스가공용으로 후지가 부적합하다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래저래 농민들만 깊은 시름에 잠겼다. 간신히 태풍 피해를 면한 고추.참깨.고랭지 채소 등 밭작물들도 잦은 비로 작황이 워낙 부진해 최소한의 영농비도 건지기 힘들게 됐다. 사과밭 4천여평, 고추밭 2천여평을 경작하는 박경목(46.청송군 파천면)씨는 "그나마 알이 큰 사과는 태풍으로 떨어졌고, 나머지는 생육이 부진하다"며 "고추도 역병과 탄저병 때문에 고추대까지 말라 비틀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보상은 새발의 피다. 공무원들도 "정부가 농민들에게 보상해 준다고 하지만 농약대, 비료값 밖에 더 되겠는냐"며 "보다 현실적인 보상이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보상은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맘 편히 농사짓게 해달라는데 그렇게 어렵습니다. 무너진 제방으로 물이 넘치듯 조만간 외국 농산물이 쏟아져 들겠죠. 한평생 땅만 보고 살았는데 이젠 어쩌라는 겁니까". 벼농사를 망친 김기석(68.의성군 구천면)씨는 고개를 떨군 채 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최봉국.김경돈.이희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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