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민 대부 제정구' 삶의 궤적

입력 2003-09-05 09:33:26

제정구(1944∼1999). 그가 말년에 14.15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탓에 청.장년시절의 업적이 다소 가려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정치판에 들어가면 예전에 그가 이룬 업적까지 오염되고 마는 한국적 정치풍토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도시 빈민의 아버지'로 불리며 한국의 사회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KBS 1TV '인물 현대사'는 5일 밤 10시부터 1시간동안 '빈민속으로-제정구 편'을 방송한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앞둔 80년대 중반, 미관상 보기 좋지 않다는 이유로 달동네 지역에 대규모 철거바람이 불어닥쳤다.

국제스포츠 이벤트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개발에 참여하는 기업들의 개발이익을 위해서는 갈 곳 없는 도시 빈민들의 딱한 사정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달동네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철거 반대운동을 펼쳤고, 그 중심에는 빈민운동의 대부 제정구가 있었다.

제정구는 70년대 중반부터 판자촌에 들어가 도시 빈민들과 함께 생활했고,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을 이끌고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에 집단 거주촌을 건설했다.

76년 양평동 철거 당시에 만든 '복음자리 마을'은 달동네 주민들에게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히며 빈민운동의 상징이 됐다.

그는 92년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98년 폐암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할 때까지 그곳 복음자리 마을에서 도시 빈민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에게 빈민은 무언가를 베풀고 도와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그들의 삶 속에서 우리 모두가 깨우쳐야 할 공동체의 이상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배운 자도 못 배운 자도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

서울이나 대구 등 전국의 달동네는 대부분 사라졌다.

그렇다고 빈곤의 문제가 해결된 것인가. 빈곤은 지하 월세방으로, 또 비닐 하우스 촌으로 숨어들었고, 부자와의 격차는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다.

제정구의 삶은 이런 빈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우리 사회가 가난을 함께 나누지 않으면 한국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곳이 될 것이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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