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길라잡이-출렁이는 감흥 표현

입력 2003-07-25 13:46:10

학모님들의 연수회에 강사로 초대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주어진 주제가 '시와 생활'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성인들의 시 읽기는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국화 옆에서'에 멈추어 있다는 것이 통설인데, 더구나 남편 출근시키고 아이들 학교 보낸 후 아침 설거지로 젖은 손을 막 닦고 나왔을 이분들에게 시를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낸다는 게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단상에 올라가자마자 대뜸 문정희 시인의 '키 큰 남자를 보면'이라는 시를 목소리를 깔아 낭송해 내려갔습니다.

'키 큰 남자를 보면/가만히 팔 걸고 싶다/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그렇게 매달리고 싶다/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아니, 바람에 나부끼는/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그의 눈썹에/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키 큰 남자를 보면'. 낭송을 끝내자 만장하신 학모님들의 얼굴에 화들짝 웃음이 피어났습니다.

깊은 산 숲 속에 숨어 핀 찔레꽃 무리가 지나가던 바람결에 자신들의 은밀한 생각을 들킨 후 차라리 깔깔깔 웃어대는 모습으로.

내친 김에 또 정희성 시인의 시 '동년일행(同年一行)'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 시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직장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일하고 계실 여러분 남편들의 속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전제를 하면서. '괴로웠던 사나이/순수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남주는 세상을 뜨고/ 서울 공기가 숨쉬기 답답하다고/안산으로 나가 살던 김명수는/더 깊이 들어가 채전이나 가꾼다는데/훌쩍 떠나/어디 가 절 마당이라도 쓸고 싶은 나는/멀리는 못 가고 베란다에 나가 담배나 피운다'. 이쯤에 이르자 학모님들은 아예 박장대소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정말 그렇지!'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발언, 이런 것이 시입니다.

시는, 생각이나 느낌을 완벽하게 표현하려는 말하기며 쓰기입니다.

따라서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는 방법을 은연중에 배우게 됩니다.

시의 어법을 일상의 어법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할 말은 태산 같사오나' 표현이 서툴러 늘 '이만 줄이기'만 하면 가슴에 한이 맺힙니다.

태평양 파도처럼 출렁이는 감흥도 표현을 잘해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적실 수 있습니다.

반짝이는 생각도 밖으로 잘 드러내야 세상 한구석이라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능력을 길러주는 일은, 그들로 하여금 세상과 원활하게 소통하며 자존의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를 읽혀야지요.

김동국(아동문학가·대구 문성초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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