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을 알면 알수록 그 옛날, 물길을 돌리지 않았을 때의 하천이 어떠했을지 궁금해진다.
새로 생긴 하천이라 신천으로 불렀다면 옛날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옛 하천은 지금의 어디로 어떻게 흘렀을까, 또 홍수가 자주 났다는데 어느 지역에서 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한 일이다.
220년 전의 신천으로 떠나가 보자. 역사 여행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시간 여행이다.
사라진 역사의 자취를 더듬어가며 상상하는 동안 선조들의 고통과 문제 해결 방식을 배울 수 있다.
또 선조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우리가 어떤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도 알아차리게 된다.
◇옛날의 신천-'대구천'
물길을 돌리기 전의 신천은 여러 자료에 보면 '대구천'이라고도 하고 '구내'라고도 불렀다
아마 구내는 새내(신천)가 생긴 후에 편의상 부른 듯하다.
따라서 정확한 명칭은 '대구읍지'등에 기록된 대구천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옛날의 신천과 대구의 크고 작은 하천은 1905년 만들어진 '조선교통지도'라는 곳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어디로 흘렀나
'대구천'은 고산골, 앞산(대덕산) 등에서 발원한 물이 파동에서 내려온 하천과 합류하면서 더욱 세력이 커져 대구의 중심지로 흘렀다.
지금의 길을 따라가 보자.
앞산, 고산골 등지에서 내려온 계곡물은 효성타운 아래 주택가 길을 따라 물길을 만들고, 파동에서 내려온 하천은 상동교 아래쪽 300여m 용보사 인근에서 서북쪽으로 물길을 틀어 봉덕시장쯤에서 만났다.
이는 지금의 신천에서 대구읍성 쪽으로 45도 비스듬히 흐르는 모양이 된다.
이 물길은 봉덕시장 네거리 북쪽 윗길인 봉덕2동 새마을금고 앞을 지나 봉덕소방파출소, 캠프헨리 후문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캠프헨리는 일제시대 일본군 병영이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병영터를 유지, 확보하기 위해 북동쪽에 인공 도랑을 파서 요새화했다.
그 흔적은 캠프헨리 담장을 끼고 복개천으로 남아 있다.
수도산 아랫자락을 지난 물은 달성십경 중 하나인 건들바위 네거리를 지나 봉산문화거리로 비스듬히 물길을 튼다.
대구학원 앞길에서 서북쪽으로 90도 몸을 튼 하천은 반월당-적십자병원-계산오거리로 이어지고 여기서 다시 남산동 등지에서 내려온 물과 합쳐져 인쇄골목으로 흐른다.
이곳 역시 복개천으로 남아 있다.
신명여고 동쪽 담장을 끼고 흐른 물은 서문파출소를 지나 인교동 오토바이골목에서 계속 앞으로 나가 달성공원 동북쪽으로 흘러 마침내 달서천과 만난다.
달서천은 대덕산, 두류산 등에서 발원한 하천으로 지금도 복개돼 달성공원 앞으로 흐른다.
달성공원 동북쪽 200여m 지점에서 만난 달서천과 대구천은 몸집을 부풀려 경부선 철도를 넘어 평리교, 비산교, 북부교를 지나 대구 염색공단내 달서천 하수처리장을 끼고 금호강으로 물길을 합쳤다.
지금의 신천에서 벗어나 대구 시내를 관통하면서 약 11km를 흐른 다음 금호강과 마주친 것이다.
지금의 신천 상동교~침산교가 8.5km 남짓한 데 비하면 약 2.5km 더 긴 셈이다.
◇어떤 지역이 물에 잠겼나
대구천은 지금의 신천보다 더 길고 경사가 완만한데다 하천 폭도 좁았다.
자연제방인 둑도 높지 않아 장마철이 되면 저지대는 늘 침수가 됐다.
오늘날의 봉덕동, 이천동, 대봉동, 봉산동, 남산동, 남성동, 달성동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대구 읍성 근처 아미산 (지금의 관덕정과 동부교육청이 있는 산) 아래로 흐르는 하천이 범람하면 대구 읍성 주변의 논밭을 휩쓸거나 때로 성안에까지 물이 넘쳤다고 한다.
1776년(정조 원년) 이서가 경상 관찰사 겸 대구 판관으로 부임했다.
이서는 대구부민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제방을 만들려 했지만 엄청난 공사비 때문에 엄두를 못 냈다.
2년 동안 자신의 녹봉을 모은 그는 공사에 착수했다.
소식을 들은 부민들이 자진해서 삽과 곡괭이를 들고 공사를 도왔다.
공사 끝에 지금의 신천으로 물길이 바뀌었고 마침내 대구 부민들은 홍수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경호(체험교육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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