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일상생활을 위해 매우 치밀한 준비를 해온 전통이 있다.
예를 들면 이른 봄이면 1년 동안 먹을 장을 담그고 또 가을이 오면 삼동 동안 먹을 김장을 담그는 일이 가정 일상사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우리민족의 식생활 문화가 다른 민족에 비해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되도록 해주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대에도 음식물을 오래 갈무리하는 비법을 터득해 온 것이 그 일례이다.
특히 김치와 같은 삭혀서 먹는 음식을 만드는 기술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것으로 선조들의 뛰어난 삶의 지혜가 배어 있는 것이다.
*실리지 않은 말 너무 많아
1년 동안 내내 장맛이 변하지 않도록 볕이 나면 장독을 열어 두고 또 이슬비라도 내리면 얼른 장독을 닫으며 관리해온 이러한 문화적 전통은 은근하게 1년을 기다리는 끈기와 저력을 길러준 것이리라. 그런데 최근에 이러한 준비성 있었던 지난 삶의 방식이 급격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내일이 없는 도시생활로 내몰려 사는 산업 자본주의적 삶의 환경 탓인지는 모르지만 내일 어떻게 되든 나몰라라 하는 삶의 방식에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져 가고 있는 듯하다.
그 하나의 예로 우리들의 일상언어의 곳간이 텅 비어 있다.
어느 날부턴가 기초가 부실한 조급하고 성급한 개발독재의 문화의 성과에 길들여진 나머지 우리 고유문화와 전통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
불과 3년만에 급조하여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리지 않은 우리말이 너무나 많다.
소설을 읽다가 또는 시를 읽다가 모르는 어휘가 있으면 으레 국어사전을 펼쳐들지만 사전에 실리지 않은 말이 너무나 많다.
민족시인 이상화의 시 '비를 다오'라는 시에서 "반갑지도 않은 바람만 냅다 불어/가엾게도 우리 보리가 황달증이 든 듯이 노랗다/풀을 뽑느니 이장에 손을 대보느니 하는 것도/이제는 헛일을 하는가 싶어 맥이 풀려만 진다!"라는 대목에서 '황달증'이라는 어휘는 '황달증세'라는 얼굴이 노랗게 변하는 간질병의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출판된 모든 '이상화시집'에서는 이것을 '달증'으로 교열하고 있다.
또 '이장'이라는 어휘는 '농기구(農器具)'를 뜻하는 대구방언이다.
그런데 얼마전 '미래사'에서 출판한 '이상화시집'에서는 '이랑'으로 교열해 두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인 민족 시인의 시가 이 모양으로 내버려져 있다.
청마 유치환의 '항가새꽃'이라는 작품에서 '항가새꽃'이 무슨 의미인지 아무리 국어사전을 찾아보아도 알 수 없다.
최근 허만하(2001,155 157)의 '靑馬풍경'에서 '항것괴'('사성통해, 상 23'), '항것귀'('훈몽자회 상8')의 '항것'은 '황가새'의 경남지역의 방언형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신조어.방언 수집 우리 몫
또 박목월의 시 '萬述 아비의 祝文'에서 "윤사월 보릿고개/아베도 알지러요/간고등어 한손이믄/아베 소원 풀어드리련만/저승길 배고플라요/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인정보다 귀한 것 일을락꼬"라는 대목에서 '엄첩다'라는 시어는 '제법이다.
기대 이상이다'로 풀이할 수 있는 방언인데 이 시어를 표준어 대사전에 찾아보아도 실려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엄첩다'라는 방언을 표준어 '제법이다'로 바꾸면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될 것이다.
목월의 '박꽃'이라는 시에 '아슴아슴, 저녁답, 자근자근'과 같은 방언어휘가 있다.
이러한 말의 뜻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답답할 뿐이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만 만들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된 것 마냥 표준말이 무엇이니 이렇게 저렇게 따라오라고만 강요하는 한국의 어문정책이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느 국민이 한국의 사전을 신뢰하겠는가? 언어의 곳간이 텅 비어 있는 쭉정이사전은 보나마나 뻔한 일이니 아무도 국어사전을 가까이 두고 참고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가까운 일본에는 명치시대부터 방언을 수집하고 언론에 보도되는 신조어(새로운 어휘)를 매년 수집해서 20권 짜리 '국어대사전'을 만들어 언어의 곳간에 양식을 가득 담아두고 있다.
어렵사리 만든 우리나라의 '표준어국어사전'의 잘못이 아니라 이제부터라도 일상국민이 알고자하는 모든 언어자료를 차근차근 수집 정리하여 일상언어의 곳간을 채워야 한다.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남북한의 지역방언(해외동포의 방언)을 수집하고 또 전문용어, 분야별 용어, 계층어, 문학어 등 광범한 언어를 수집 정리하여 텅 빈 언어의 곳간을 채워 넣는 일에 골몰해야 한다.
이일을 어느 다른 사람이 해 주지 않는다.
이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할 책임이 있다.
이상규 경북대교수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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