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2003-사진작가 석재현씨 사건

입력 2003-06-23 09:34:10

지난 1월18일 오전 6시30분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중국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항. 살을 에는 듯한 엄동의 추위와 불안에 떨며 탈북자 80여명이 자유의 땅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탈북자들의 해상 망명 시도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온 다국적 비정부기구(NGO)가 주도했다.

암호명 '리본'. 두척의 배를 은밀하게 동원해 탈북자들을 중국에서 공해로 이동하는 작전.

그러나 이 망명 계획은 탈북자들이 배에 오르기 직전 정보를 사전에 파악하고 들이닥친 중국 공안에 의해 무산됐다.

이 탈북자들의 망명 현장에 대구출신 사진작가 석재현(33·대구 수성구 두산동)씨가 있었다.

그도 공안에 붙잡혔다.

석씨는 탈북자들의 생생한 망명 과정을 영상에 담기 위해 망명작전에 동행했다.

석씨는 중국 공안에 붙잡히기 직전 부인과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곧바로 한 재미교포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밖에 중국 공안 1개소대가 와 있다.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다.

지금부터 내가 무슨 일인가 해야할 것 같다"란 다급한 말을 남기고 전화가 끊겼다.

체포된 석씨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강력한 무죄 석방 요구에도 불구하고 탈북자 망명을 도운 혐의로 지난달 22일 중국 산둥성 옌타이 중급법원에서 '타인 불법 월경조직죄'로 징역 2년형과 벌금 5천위안(약 75만원)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석씨는 1심판결에 불복, 지난달 29일 지난(濟南) 고급법원에 항소했다.

이번 탈북자 망명 계획은 국내 탈북자 지원단체인 두리하나 선교회 천기원 선교사가 총괄했고 일본의 북한난민구호기금, 유럽의 국경없는의사회 등 다국적 비정부기구들이 참가했다.

천 선교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석씨는 탈북자들의 망명을 돕기위해서가 아니라 기록을 남기기 위해 따라간 것일 뿐"이라며 "중국 법원이 석씨에 대해 '탈북자들의 망명을 도왔다'고 판결한 부분은 잘못됐다"고 강조했다.

석씨의 아내 강혜원(38)씨는 "실제로 남편은 재판과정에서 '누군가 도와달라고 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어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준 것이 전부'라고 확실히 밝혔다"고 했다.

또 강씨는 "남편이 지난 1월 11일 서울에서 열린 탈북자 망명 관련 회의에 참석한 뒤 '내가 아니면 일본인이 탈북과정을 촬영하게 된다.

우리 민족의 일을 일본인에게 맡기고 싶진 않다'는 심경을 밝혔다"고 전했다.

그 후 석씨는 13일 카메라와 촬영장비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고 18일 붙잡혔다.

이날 모두 48명이 붙잡혔고 석씨외에 무역업을 하는 개인활동가 최영훈(40)씨도 포함됐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지난달 22일 "불법이민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매우 명확하고 밀입국 및 불법이민 등을 일관되게 반대해 왔다"고 밝혔다.

석씨는 경일대,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보도사진을 공부한 후 현재 경일대 강사로 일하고 있으며 3년째 미국 뉴욕타임스 등에 프리랜서로 사진을 공급해오고 있는 실력을 인정받은 사진작가다.

석씨의 석방을 위한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주한 중국대사관이 있는 서울 교보빌딩 앞에는 지난 14일 10여명의 사람들이 석씨의 석방을 요구하며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중엔 벽안의 외국인 5명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우익단체인 '애국청년단'과 'RESOLUTION 217' 단체의 회원들. 이들은 '중국 독재법정의 대한민국 언론자유 유린을 좌시하지 말라'는 등의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한편 지나가던 시민들에게 석씨의 억울함을 알리며 석방을 위한 서명을 받았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30일자 사설을 통해 "석씨는 억압적인 체제에서 탈출하기 위해 중국을 떠나는 탈북자들을 취재한 것 뿐"이라며 중국당국에 석방을 촉구했다.

또 미국의 언론인 인권보호단체인 언론인보호위원회(CPJ)도 1월 24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 앞으로 서한을 보내 석씨의 즉각적인 석방을 촉구했고 국경없는 기자회(RSP), 서울외신기자클럽 등도 이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석씨가 강의했던 경일대 사진영상학과와 지역대학 사진관련학과 학생들, 한국다큐멘터리사진학회, 현대사진영상학회, 한국사진학회 등은 석씨가 붙잡힌 후 탄원서를 작성, 주한 중국대사관에 전달했다.

석씨의 구명을 위한 홈페이지(www.jhseok.com)의 서명자가 4천600명을 넘었고 지금까지 석씨 석방을 위해 서명자는 온 오프라인 포함 1만5천여명이나 된다.

석씨가 공부했던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 동문회와 언론인보호위원회(CPJ)도 석씨 석방을 위해 중국 정부에 편지보내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사진작가 석재현 무사귀국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강위원(경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는 "현재 석씨의 2학기 강의 시간표까지 다 짜놓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석씨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며 "'미국 교도소 내에서의 생활', '외국인 노동자' 등 인간의 휴머니티에 초점이 맞춰져온 석 교수의 작품 세계로 볼 때 그의 관심이 탈북자로 옮겨간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국내외의 활발한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나라 정부는 팔짱만 끼고 있다.

외교통상부 한 관계자는 "중국의 국내법에 따라 재판이 이뤄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때문에 이번 사건 사실관계에 대한 자체 조사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애국청년단 강인구(37) 사무국장은 "지난해 10월 일본인이 중국에서 탈북자를 탈출시키려 한 혐의로 체포됐을 때 일본은 정부차원에서 자국민의 석방을 강력하게 촉구했는데 우리 정부는 너무 중국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석씨의 석방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재판결과에 이목을 집중되고 있지만 전망이 밝지만은 않은 실정이다

계명대 장병옥 교수(국제학 대학 중국학과)는 "석씨가 실제 취재 목적으로 탈북자들과 동행했다 하더라도 관광비자로 입국했기 때문에 법정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며 "우리나라 정부는 양국 관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의 외교적 노력으로 중국에게 석씨 석방과 관련, 명분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석씨의 변호를 맡은 송성철 변호사도 "중국에서 원심 판결을 깨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감형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고 전망했다.

6월 말쯤 2심 재판 일정이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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