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력이 약할땐 화평책을 쓰라는 바둑격언이 있다.
바로 세고취화(勢孤取和)의 계명이다.
형세가 외로울땐 싸우지말고 평화를 구하라는 얘긴데, 대개의 아마추어들은 그 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놈의 욕심'때문에 상대방의 실수까지 은근히 기대하면서 "못먹어도 고!"를 외치다 망하는 바둑이 허다하다.
지난 대선에서 아마추어 노무현은 이 계명을 지킴으로써 이겼고 이회창은 어김으로써 졌다.
노무현은 정몽준-이회창이란 '3자(者)필패'의 형국에서 정몽준과의 화평을 택했다.
전리품의 절반을 걸고 양자(兩者)구도를 만들고, 이겼다.
그러나 창(昌)은 '양자필승'의 대착각에 빠졌다.
천하태평심(天下太平心)으로 반상(盤上)의 판세-세상여론이 낡은 정치에 신물느낌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노(盧)가 정(鄭)에게 던진 미끼가 '분권형 대통령'이었다.
'집권시 5년간 국정동반자로서의 공동책임'을 지는 권력분할이었다.
정치동업(同業)이었다.
이걸 지금 곰곰이 그리고 냉정히 되돌아 보면, "만일 그때 정몽준이 판을 깨지않고 공동정권으로 갔다면 지금 정치가 어떻게 됐을까?"다른 사람들은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 안드는지 모르겠다.
노(盧) 혼자서 대통령을 해도 그 정책과 말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판에 도무지 '코드' 안맞는 정 후보측 장관들이 내각에 차고 앉아 딴소리를 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배가 산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노 대통령도 운이 좋지만 최근 귀국한 정씨 또한 "그때 판깨고 참 잘나왔지"하며 가슴 쓸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정몽준의 선택은 처음은 불행이었으나 나중은 행운이었다.
그래서 정몽준씨에게도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재기의 기회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게 말많고 탈많은 한국적 정치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다시 '세고취화'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작전의 상대가 정몽준에서 한나라당으로 바뀌었다.
그는 두달전 국회 첫 국정연설에서 한나라당에 '정치동업'을 제의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한나라당의 당권경쟁에서 후보간 쟁점의 하나가 되어 있다.
소위 '총선 후 국정 참여론'의 논쟁이다.
청와대가 던진 '미끼'하나에 "먹자" "말자" 시끄러운 것이다.
즐거운 건 미끼를 던진 쪽이다.
정치동업의 내용인즉 내년 총선결과 과반수 정당에 내각구성권을 주겠다는 것이다.
동거(同居)정부의 조건인즉 '특정지역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특정 정당이 갖지 못하게 선거법을 개정해 달라'는 요청이다.
명분은 맞다.
그러나 장사하는 사람들도 동업은 참 어렵다고 한다.
뜻은 좋았지만 곧잘 견해가 부딪치고 특히 돈문제로 서로 의심하기 시작하면 동업은 이미 파경길이다.
그만큼 동업은 어렵다.
하물며 나라를 경영하는 정치동업에서랴.
사실 정치에서의 동업은 한 정치집단이 독자적 집권(국정운영) 가능성이 낮을때에 나오는 소린데, 지금은 '지역갈등구조의 극복'으로 예쁘게 포장돼 있다.
문제는 이 '세고취화'전략의 호.불호(好不好)가 아니라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취하고 있는 행태가 문제다.
노 대통령의 이 제안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우선 집권여당 단독의 '책임총리제'부터 확실하게 보여줘 보라. 책임총리제란 여태껏 없던 걸 만들어낸 특수용어가 아니다.
헌법에 보장된 장관제청권.정책수행권한을 총리에게 '확실하게' 돌려주는 것이다.
'코드'가 딱 들어맞는 자기네 내각도 못미더워 배놔라 감놔라 하면서 코드가 영 딴판인 야당총리.장관들과 어찌 한이불 덮고 자겠다는 것일까?
한나라당은 왜 이런 위험한 동업제의가 들어왔는지부터 반성해야 한다.
아무래도 청와대와 개혁세력들의 눈엔 한나라당이 만만한 것 같다.
10년 야당에 도무지 체질바꿀 생각이 없는 한나라가 '영원한 야당'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 책임은 100% 한나라의 몫이다.
지금 당권경쟁에 정신 빠진 그 당의 속사정을 보라.
개혁이란 두 글자 때문에 대선에서 망해 먹고도 구태(舊態)의 연속이다.
여섯 후보의 주장하는 바 또한 소이대동(小異大同)-혁명적 발상이 없다.
지구당 폐지를 요구하는 소장파들의 목소리에도 힘이 없다.
이런 체질로 동업하면 여.야가 아니라 국민이 망할 것 같다.
"대선후 지금까지 한나라당이 한 일은 표류와 방황, 현실안주 뿐이었다"는 김용환 의원의 쓴소리가 새롭다.
26일 전당대회를 전환점으로 여당이 하지 않는 '그 무엇'을, 새로운 개혁신당에 대응하는 그 무엇을 내놔야 한다.
안그러면 한나라당은 그야말로 한(恨)나라당이다.
강건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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