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장애인 90명 한라산 등반대회-"평생의 첫 경험 포기할 수 없죠"

입력 2003-06-11 15:01:51

부슬부슬 여우비가 내리던 10일 오전 10시쯤 한라산 북서편 '아리목' 등산로 코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나무계단을 오르는 장애인, 등줄기에 땀이 흥건한 채로 휠체어를 어깨에 짊어졌거나, 아예 장애인을 들쳐 업은 자원봉사자들이 긴 행렬을 잇고 있었다.

더러는 나무등걸에 우비를 깔고 등산을 포기하는 장애인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내 평생 처음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이를 악물고 고지를 향했다.

이날 행사는 대구국제휠체어마라톤대회집행위원회(위원장 이형록)가 마련한 '대구국제휠체어마라톤 및 U대회 성공적 개최 기원을 위한 장애인 한라산 등반대회'. 대구지역 지체·시각·정신 장애인 90명, 자원봉사자, 일반시민 90명 등 모두 180여명이 참가, 신발끈을 동여맸다.

출발점에서 7.5㎞ 떨어진 해발 1천500m 위치의 '윗세오름'이 목표고지. 등반이 통제된 백록담에서 2.8㎞ 떨어진 곳이다.

일반인도 2시간은 걸린다는 등산로를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이 올라가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출발 15분여만에 마주친 폭 20여m의 'Y자 계곡'. 30여명의 참가자들이 아쉽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대다수 장애인 참가자들은 "일단 가보자"며 오히려 자원봉사자들의 손을 끌었다.

"지팡이 짚고 다니는 게 익숙해지면 나중엔 지팡이 없인 못 살아요". 김기태(66·대구 범물동·지체장애2급)씨는 불편한 다리를 끌면서도 차분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등산이 처음이라는 그는 "끝까지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가는데까지 가볼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오전 10시35분쯤. 등산로 군데군데에서 아픈 다리를 쉬는 이들에도 아랑곳없이 이정해(57·여·대구 송현동)씨는 힘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미 마음은 고지에 다다른 듯 "내려갈 땐 더 힘들겠다"고 했다.

지체장애자로 하루종일 집안에서만 생활해왔다는 이씨는 "내 평생에 다시 없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며 땀을 쓸어올렸다.

이날 한 모자의 눈물겨운 등반은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진한 감동을 일으켰다.

오전 11시쯤, 교통사고로 장애를 맞았다는 사공상선(57·여·대구 지산동)씨는 저만치 앞서 자원봉사자의 등에 업혀 올라가는 아들 최은호(30·정신·지체장애)씨를 보며 대견한 듯 안쓰러운 듯 복잡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버지 없이 홀로 키운 장애인 아들, 막내아들을 입양보내야 했던 아픔, 영구임대아파트에 살면서 정부지원에 생계를 기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삶.... 그러나 모자는 사회의 편견에 보란 듯 용감한 도전을 감행했다.

"TV에서만 보던 제주도에 오다니 꿈만 같아요. 평생 소외받으며 흘렸던 눈물이 씻어지는 것 같아요".

80kg은 넘을 듯 보이는 육중한 몸에 도시락, 배낭까지 짊어지고 아들을 따라나선 어머니.... 배낭은 무겁게 왜 들고 왔느냐고 하니, "(아들)팬티, 바지가 들었어요. 애가 오줌을 싸거든요"한다.

나무에 기대 숨을 고르던 어머니는 아들이 보이지 않자, 다시 허위허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자원봉사자들의 열의도 돋보였다.

특히 '사랑의 제주관광도우미' 봉사단 20여명은 4명이 교대로 장애인 1명과 휠체어를 번갈아 들며 타지에서 온 손님들을 끝까지 도왔다.

봉사단의 최한기(40·제주)씨는 "휠체어가 갈수록 무겁게 느껴진다"면서도 "몸이 불편한데도 끝까지 오르려고 하는 장애인들의 열의가 대단하다"고 박수를 보냈다.

이날 3시간여 걸려 고지인 '윗세오름' 등정에 성공한 이들은 장애인 19명을 포함해 모두 47명. 한 장애인 참가자의 말처럼 "몸 불편한 것보다 두려운 '마음장애'"를 이겨낸 인간승리의 행로였다.

대구국제휠체어마라톤대회집행위원회 이형록 위원장은 "산에 오른 장애인들이 바깥바람 쐬는 것 이상의 많은 것을 얻어갔으면 한다"며 "오는 9월 20일, 21일 대구에서 열리는 마라톤 대회를 통해 장애인들이 오늘처럼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고 당부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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