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이 대부분이었던 대구시가 근대적 도로계획을 세운 시기는 1965년(인구 81만1천여명). 10년 후 모두 350㎞의 도로를 신설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이 계획이 순차적으로 실행되면서 대구의 남북간 및 동서간 도로 골격은 1974년 지금의 형태와 거의 엇비슷하게 갖춰졌다.
처음으로 도로 구간마다 '가로명'이 붙여졌으며 당시 대구 인구는 126만6천여명이었다.
중앙로(대구역∼영대네거리)와 통일로(도청∼대구역), 동대구로(파티마병원∼수성못) 등 남북간 주요 축도로를 비롯, 대동로(반월당∼당시 경산군 경계)와 대서로(반월당∼강창교), 서신로(옛 대구은행 본점∼대신동∼서대구공단), 동신로(옛 대구은행 본점∼무열대) 등의 동서간 도로가 이 때 이름을 받은 도로다.
1970년 초반에서 중반 당시 대구의 역점 도로사업은 남북 관통이었다.
경부선 철로가 대구 중앙을 양분하면서 남북간 통행에 지장이 많았던 것.
그러나 1970년대 후반까지는 오늘의 시각으로 볼 때 '제대로 된 도로'가 아니었다.
중앙로 정도만 오늘의 모습과 엇비슷했을 뿐 나머지 도로는 폭이 좁고 대부분 포장이 안돼 있었다.
도로가 지금의 모습과 엇비슷하게 따라온 시기는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이때부터 대구의 '명물도로'가 잇따라 개통됐으며 동서간 도로 체계도 갖춰졌다.
1980년 15년의 역사끝에 10.4㎞에 이르는 달구벌대로(당시 대동.대서로) 확장 포장이 끝났고, 1984년 당시로서는 혁명적 도로폭(70m)이었던 동대구로 포장이 완전히 마무리됐다.
동서간 주요 축인 태평로도 1980년 30m의 도로폭으로 확장됐고 동.서신로도 이보다 한 해 앞선 1979년 35m로 노폭이 넓어졌다.
대구 최초의 도시 고속화도로인 신천대로는 1992년 개통됐다.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는 앞산순환도로도 1997년 완전한 모습을 갖췄다.
신천대로 대체도로였던 신천동로도 1998년 개통됐으며 1999년 대구 최초의 유료도로인 국우터널이 뚫렸다.
최경철기자 koala@ima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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