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상대(partner)'가 있는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교는 특정 국가의 절대적 논리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그리고 외교는 국익이라는 현실적 이해(利害)를 추구하면서 이념적으로는 국제협조라는 이상적 에토스(ethos)에 의해 제약을 받는 이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와 그로티우스의 이상주의 사이를 방황하는 어포레어(aporia)-딜레마가 바로 외교이다.
따라서 외교는 이상이라는 보편성과 국익이라는 특수성의 끊임없는 타협을 전제로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타협은 본질적으로 이상과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동시에 남기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방일 외교를 두고 정치권이 '등신(等神) 외교(한자를 그대로 풀어쓰면 '신과 같은 외교'라는 뜻이 될까?)' 공방을 벌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외교의 본질 외에 한·일간에는 특수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노 대통령의 방일이 미국 방문 때보다 더 큰 논란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번 방일에는 현충일에 일왕과의 만찬, 아소다로 자민당 정조회장의 창씨개명 망언, 유사법제라는 3중고가 있었다.
만약 방미 때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그리 크게 문제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대통령이 방일을 앞두고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친미는 이해될 수 있으나 친일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을 꼭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는 의견을 개진했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우월주의와 열등주의(피해의식)의 심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현실의 어포레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일관계는 아직 미성숙 상태이며, 명확한 관계 정립이 어려운 갈등구조를 내포하고 있다.
과거사에 대한 책망을 하면서 경제협력을 요청해야 하고, 북핵 문제에 대한 도움을 청하면서 유사법제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모순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의 상반된 관계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이 한·일관계이다.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에 대한 수위 조절이다.
우월주의와 열등주의 즉 이상과 현실의 조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방일은 우월주의를 다소 희생하더라도 현실적 열등주의를 보충하고자 한 것이었다.
국내적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현충일에 방일을 강행한 것은 북핵문제 해결이라는 현실적 요구가 더 절실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방일 외교를 결산하는 기자 간담회에서 "과거사에 대해선, 민감한 것이고 가급적이면 좋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은 피했다.
…북핵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그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언급한 것은 그 때문이리라.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굳이 국빈방문을 고집하기보다 실무방문이 바람직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협조체제 구축, 과거사에 대한 질책 등이 비판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남는다.
영국의 외교관 니콜슨 경(Sir G. Harold Nicolson)은 "외교이론은 배타적 종족적인 권익의 편협한 개념으로부터 포괄적인 공통이익의 광범한 개념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한·일 외교도 종족적인 배타적 이해의 추구에서 공통 이익으로 발전시켜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외교문제로 국론이 분열되어서는 안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가지고 있다.
힘이 있는 나라는 힘 그 자체가 무기이기 때문에 별다른 외교력이 필요치 않다.
"미국이야말로 곧 법이다"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손님을 초청해놓고 그 손님에게 3중고를 안겨주는 일본도 그러한 힘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그럴만한 힘이 없는 우리에게는 그들을 조련할 수 있는 외교력이 필요하다.
이번의 방일 외교를 교훈삼아 좀더 세련된 한·일외교를 펼치자. 이번 방일이 국익과 국제협조의 조화, 과거사와 미래의 조화를 통한 동북아 구상을 펼칠 수 있는 초석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많은 뉴스
이진숙·강선우 감싼 민주당 원내수석…"전혀 문제 없다"
"李 '이진숙, 문제있는 것 같아 딱하다' 언급"…정규재 전언
"꾀병 아니었다…저혈압·호흡곤란" 김건희 여사, '휠체어 퇴원' 이유는
전국 법학교수들 "조국 일가는 희생양"…李대통령에 광복절 특별사면 요청
첫 회의 연 국민의힘 혁신위, "탄핵 깊이 반성, 사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