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경주 (1)기형도시

입력 2003-06-09 09:36:47

20, 30년전까지만 해도 경주는 인근 포항이나 울산에 앞서가는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후발 도시들에 뒤처지고 있다.

경주 시민들은 1955년 시로 승격한 경주가 근래들면서 발전하지 않고 되레 정체된 원인을 두고 한탄의 소리로 가득하다.

인근 도시는 지난 40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시민생활이 급속도로 향상되어온 반면 손발이 묶인 형국이 된 옛도시 경주는 상대적인 박탈감에 시달려 왔다.

문화재 보호라는 미명 아래 개발제한을 당해온 경주 시민들에게는 문화재심의위원회가 저승사자처럼 무서운 존재였다.

고도제한도 그 중 하나. 문화재 보호와 경주 발전과의 관계는 해결 방안이 없는가.

"기형화 돼 가고 있는 경주, 이대로 둘 것인가". 천년고도 경주지역에는 가는 곳마다 문화유적지가 살아 숨쉬고 있어 연중 많은 국내외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다.

경주대.동국대.위덕대.서라벌대 등 3개 종합대학과 1개 전문대학이 있어 관광객을 포함한 유동인구는 연 1천만명에 육박하고 있지만 상주인구는 29만명선에서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행정당국이 신도시건설 등 인구유입 정책을 게을리한 탓도 있지만 문화재보호법을 앞세워 건축규제가 심했기 때문이라고 건설업 관계자들은 풀이한다.

외지 건설업계에서는 "창업을 하려면 경주를 피하라", "주택 사업은 경주를 피하라"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돼 있다.

한번 걸렸다 하면 1년 또는 2년씩 문화재 발굴조사에 허송세월을 보내야 하고 결국 유적보존을 앞세워 불허방침이 내려질 땐 시간 낭비와 물질적 피해 또한 엄청나다.

이런 와중에 경주시 동천동 구획정리지구에는 최근 수년사이 아파트를 짓고 남은 자투리에 빌라가 우후죽순격으로 난립하고 있다.

잘못 그어진 도시계획도로 때문에 주민들의 불편은 물론 외지 차량들이 이곳에 잘못 진입했다가는 방향을 잃고 허둥대기 일쑤이다.

고적도시가 기형화 돼 가고 있는 것은 경주는 도시계획상 지정된 아파트 지구가 없는데다 문화재 출토로 택지를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빈틈만 있으면 아파트 허가를 신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시내를 비롯 안강.강동.외동.건천 등지의 농촌지역까지 고층아파트가 마구잡이로 들어서고 있는 것은 택지난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남산.명활산.선도산 등 영산과 불적고분으로 가득한 경주지역에는 한때 자연을 훼손해 가면서까지 건축허가를 남발, 고도경주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잔뜩 기대를 걸고 경주 고적지 여행길에 오른 이구석(55.경기도 의정부시 가음동)씨 부부는 현곡면 금장리에서 형산강 철교를 건너 황성동으로 이어지면서 철로변 양쪽에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를 보고 "일산과 분당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경주에 가면 골기와집으로 가득 차 있을 줄 알았던 관광객들은 영산을 가린 아파트숲을 보고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황성.용강동 일대의 경우 최저 13층에서 최고 18층까지 허가되어 오다가 90년대 초엔 최고 20층이 허가되는 등 아파트가 고층화 된 지 오래다.

산업도로를 끼고 있는 국립공원 금강산 입구만 해도 고층아파트가 건립돼 경주를 찾는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특히 경주관문인 용강동 경우 인접한 지역에 공단이 조성될 때만 해도 주변이 농경지로 허허벌판이었지만 럭키.청구.현대 등 대형업체들이 고층아파트를 경쟁적으로 건립, 단지화하면서 공단이 밀려나게 됐다.

경주시민들은 "공단을 관문에 조성한 졸속행정도 문제지만 공단주변에 아파트단지를 조성한 주먹구구식 도시.건축행정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황성동 일대는 문화재발굴 조사에서 동양최대 야철지가 출토돼 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지역인데도 결국 고층아파트가 허가돼 막대한 발굴비만 날리고 유적지가 모두 파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

1988년부터 아파트 붐이 일기 시작한 경주지역은 그동안 78개 단지에 3만1천80가구가 난립해 중요문화유적지를 가리는 등 경관을 해치고 있다.

층수에 있어 고도제한으로 획일적이지 못하고 들쭉날쭉해 보기 흉하다.

금년만 해도 현곡면 금장리에 주공아파트 526가구(10층), 충효동 400가구(8층), 현곡면 나원리 240가구(5층) 아파트가 승인되었다.

충효동 일대 아파트 경우 유적지에서 가까운 거리 때문에 문화재청 문화재심의위원회에서도 잦은 지적이 있었지만 경주시는 주택난 해결을 위해 아파트 건립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시민들은 "고도경주에 걸맞은 주택단지가 조성되어야 한다"면서 "이 상태로 방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기형도시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우려했다.

경주시 전규영 건축과장은 "이미 건립된 아파트는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택지개발때 아파트 지구가 지정돼야 한다"며 "사태해결을 위해 신도시조성과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고도보존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주취재팀=박준현.이채수.윤종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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