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비밀의 정원

입력 2003-06-09 09:36:47

내 연구실에서는 갑장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아스팔트 포장이 된 큰 길이 나 있지만 얼마 전만 해도 갑장산 가는 길은 한 편에서 차가 오면 다른 편에서 가만히 비켜 주어야만 하는 좁은 오솔길이었다.

늦가을 처음 이 오솔길에 들어섰을 때 마을 어귀의 감나무들은 주렁주렁 열린 감들을 이기지 못하여 가지가 휘늘어질 정도로 주홍빛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사람들이 붐비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나무숲들이 좋아 주말이면 우리만이 아는 비밀의 정원인 갑장산을 찾곤 했다.

그동안 그저 습관적으로 아무 감흥 없이 읊조리던 '산에는 꽃이 피네'라는 김소월의 시가 산을 찾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며칠 사이에 잎사귀들은 연둣빛에서 초록빛으로 바뀌어져 있었고, 노란 산수유가 있던 자리가 어느새 진홍빛 진달래로, 또 어느 틈엔가 붓꽃으로, 은방울꽃으로 계속 옷을 바꾸어 입었다.

한 꽃이 지면 또 다른 꽃이 우리를 위해 피어 주었다.

그야말로 갈 봄 여름 없이.

비밀의 정원에는 꽃과 나무들만 있지 않았다.

숲 속에선 사슴벌레며, 장수하늘소, 그리고 도마뱀이나 뱀도 이따금씩 만났다.

하루는 숲 길 가운데에서 두꺼비 한 마리가 두 눈을 껌뻑이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두꺼비가 우리를 반긴다고 좋아서 야단법석이었다.

그 부근에서 그 두꺼비를 몇 번 더 만났다.

그 후 아이들이 산에 가기 싫다고 할 때 두꺼비가 기다릴 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쉽게 아이들을 비밀의 정원으로 유혹했다.

갑장산 입구에는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용흥사라는 소담스런 절이 있다.

절 앞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에 있는 개구리알과 올챙이들은 아이들의 몇 시간 놀이감이었다.

아이들은 용흥사 앞에 핀 커다란 수국을 보고는 왕만두 꽃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 후 우리 가족에게 수국은 왕만두 꽃이라고 불린다.

어느 해 사월이었던가. 잔설이 남아 온통 흰 눈밭 속인 갑장산 정상에 진달래가 붉게 피어 있었다.

겨울과 봄이,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는 마치 꿈 속 같은 경험이었다.

우리 가족들의 기억 속에 갑장산은 영원히 그리운 비밀의 정원으로 남아있다.

허정애 상주대 교수.영문학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