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이민 100년의 숨결-쿠바의 한인들

입력 2003-06-07 09:57:52

헤밍웨이가 연평균 25도의 아열대 해양성 기후를 즐기며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던 낭만과 정열의 나라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160㎞ 떨어진 세계적 휴양지 바라데로의 거리를 거닐고 있으면 길가에 서성이거나 쭈그리고 앉아있던 흑인 청년 몇명이 경찰관 눈치를 살피며 동양에서 온 이방인 기자에게 다가와 '치노(중국인)?'라고 물으며 친근하게 아는 체 한다.

아니라고 하면 즉각 '꼬레아노'라는 말이 '야파니스(일본인)'보다 먼저 튀어나와 정식 외교관계는 없지만, 이 나라의 자동차.전자제품 시장을 석권하면서 높아진 한국의 인지도를 실감하게 된다.

청년들은 앞다퉈 자기나라의 세계적 명품인 시가와 럼주, 걸(girl) 세 단어를 연발하며 관심이 있느냐고 달라 붙는다.

겨우 뿌리치고 길을 재촉하지만 얼마 못가 또 다른 젊은 무리가 접근, 똑같은 질문을 해댄다.

달러벌이에 나선 불법 판매상이다.

불법 매춘도 알선한다.

아바나 등 관광도시의 가로와 호텔 주변에서는 늘 이같은 호객행위에 시달려야 한다.

많은 쿠바인들이 사회주의 체제와 미국의 경제봉쇄에 따른 생산기반시설 붕괴로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허덕이면서 직장에서 몰래 빼낸 물건으로 달러를 벌기 위해 암시장을 기웃거리고, 심지어 몸까지 팔고 있는 것. 쿠바 돈(페소화)이 아무리 많아도 배급체제 아래서 국영상점 앞에 장시간 줄을 서야하고 설탕, 밀가루, 비누, 식용유, 달걀 등 생필품을 원하는 만큼 구입할 수가 없다.

대신 달러만 있으면 외화상점에서 질좋은 물건을 넉넉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잘사는 미국과 멕시코에 친인척을 둔 가정은 달러를 송금받으며 풍족하게 살지만 해외에 연고가 없는 다수 국민의 삶은 궁핍하다.

쿠바인들은 "정부가 대외에 살기 좋은 지상낙원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서민 평균월급이 250페소(10달러 정도)에 불과한 어려운 경제생활 속에 저축은 꿈도 못꾼다"며 비판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곳의 한인 노인들은 "특히 젊은이들은 절도와 매춘으로 돈을 쉽게 벌어 제대로 일하지 않는다"면서 "힘들지만 근면.성실하게 살아온 한인들이 물들까봐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든 국가 최고기관인 국가평의회 의장 카스트로(77)에 대해 쿠바 사람들은 세계를 향해 큰 소리칠 줄 아는 유능한 지도자로 생각하고 대체적으로 좋아한다.

국민성이 낙천적인데다 국가가 기본수준의 생활을 평등하게 제공하고 의무 고등교육과 무료 의료혜택을 주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지난 2월6일 임기 5년의 의장에 재선된 카스트로의 44년에 걸친 세계 최장기 독재도 가능한 것 같다.

특히 쿠바인들은 1967년 볼리비아에서 피살된 혁명투사 체 게바라의 얼굴을 길거리 간판과 화폐, 생활용품, 관광상품 등 곳곳에 새겨 신적인 존재로 추앙한다.

1959년 미국에 대항해 쿠바혁명을 승리로 이끈 체 게바라는 지금처럼 초강대국 미국이 탁월한 군사.정보력과 세계인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는 문화권력,자국 체제나 종교를 위해 다른 민족과 국가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오만을 갖고 벌이는 신패권주의가 극에 달할수록 혁명영웅으로 되살아 난다.

쿠바는 아바나 220만명 등 인구 1천200만명 중 흑백혼혈인 물라토와 홍백혼혈 메스티소가 52%로 절반을 넘고 백인은 37%, 흑인이 11%를 차지해 유색인종에 대한 거부감 등 인종차별은 거의 없다.

공산국가답지 않게 성문화도 파격적이다.

쿠바인은 성관계가 자유로운 전통이 오래돼 섹스를 일종의 '놀이문화'로 생각한다는 것. 법적으로 18세부터 결혼이 가능하나 보통 12~15세에 '첫 경험'을 갖고 혼전동거가 성행한다.

이런 경우가 기혼자의 70%나 된다.

이혼율도 70%로 세계 최고수준. 평균 결혼횟수는 2~3회다.

그러나 중학교 때부터 성교육을 철저히 받아 매춘 이외엔 미혼모나 낙태, 성병 등 부작용은 거의 없단다.

이민 3~5세대 젊은층 한인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거리에 흔한 값싼 디스코텍과 댄스홀에는 밤마다 정열적인 쿠바인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이 곳을 찾는 구릿빛 팔등신 미녀들은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피부색에 관계없이 마음에 드는 남성과 진한 키스나 애무를 나눈다.

흥겨운 라틴음악에 맞춰 격렬하고 현란한 살사댄스를 추다가 달러를 벌고자, 하룻밤 쾌락을 위해 국내외 남성과 함께 밖으로 나서는 게 예사다.

그 진도도 무척 빠르다.

대부분의 젊은 여자와 상당수 중년 여성들까지 사철 더운 날씨 탓인지 자연스럽게 핫팬츠와 초미니스커트나 배꼽티를 입는 등 과감한 노출로 기자의 눈이 민망할 정도였다.

단돈 1달러는 쿠바 하층민 월급의 20~30%에 달하는 23~28페소에 해당, 호텔 종업원에게 팁으로 1달러만 줘도 대접이 달라지는 등 큰 위력을 발휘한다.

외국인 접객업소 종사자는 선망의 직종으로 고위층의 친인척이 아니고선 취업이 어려운 실정이다.

경제력에 비해 의료기술은 세계적 수준이다.

1만여 의학자와 200여개 연구센터가 의료강국임을 자랑하고, 성형외과와 안과분야는 세계 최고다.

특히 성형분야는 쿠바인에게는 무료이고 외국인에게도 100여달러 이하의 저렴한 가격에 시술, 유럽인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거리의 차량 대부분은 차령 20~50년이 지나 시커먼 매연을 마구 내뿜는다.

극심한 에너지난으로 구형 트럭에 객차 2~3개를 매달아 만든 시내버스는 초만원 상태로 운행한다.

횡단보도가 전혀 없어 운전자들은 곳곳에서 불쑥불쑥 도로에 튀어나오는 보행자로 인해 경적을 울리며 간담을 쓸어내리기 일쑤지만 행인들은 태연하고 여유로울 뿐이다.

국가가 인터넷을 통제해 정부관리와 사업가, 외국인만 이용이 가능하지만 큰 불만은 없는 편이다.

쿠바는 16세기부터 미국과 유럽,중남미를 잇는 카리브해의 중심 관문으로서 화려했던 옛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하나같이 훌륭한 예술품인 중세 유럽풍 건물은 장기적인 경제난으로 수리가 안돼 온통 도색이 벗겨지고 군데군데 부서져 흉하고 남루한 몰골을 하고 있다.

대미 종속관계 탈피에는 성공했으나 사회주의 혁명의 이데올로기만으론 국민 모두를 먹여살리는데 실패한 쿠바가 급변의 시대를 맞아 모색하고 있는 개방정책이 어떤 결과를 낳을 지 자못 궁금하다.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이 땅의 꼬레아노들은 이같은 환경과 문화에 적응, 쿠바인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자족하며 살고 있다.

이들이 현지인과 한가지 다른 점은 마음 속에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이란 배경을 간직, 생활에 든든한 힘이 된다는 사실이다.

바라데로=강병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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