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군경 42가구 삶의 터전이던 그곳 '성당용사촌'을 아십니까

입력 2003-06-06 11:55:58

6·25 전쟁이 종전 된지 올해로 50년. 그때의 참전 용사들 중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큰 부상을 입고 힘들게 살아온 상이용사들도 거의가 70대에 이르렀다.

대구 대명4동 성당용사촌은 그런 아픔들이 고스란히 고여 있는 곳.

◈국가지원 69년 입주

경상공고 뒤 언덕배기에 30여평짜리 주택 42채가 건립되고 상이용사촌이 형성된 것은 1969년이었다.

국가 지원금으로 산을 깎아 만든 마을에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공동목욕탕까지 갖춰졌었다.

그 목욕탕은 이제 없지만 동판에 새겨진 '새마을 목욕탕' '대통령 하사금' '전상 용사 후생복지' 등의 글귀는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을 복판에 세워진 공동공장 내부에도 '근면 자조 협동' '물자 절약' '품질 향상' 등 구호가 그대로 붙어 있고, 어두컴컴한 전등, 오래된 미싱기 등과 어울려 1970년대 새마을공장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한땐 공동목욕탕도

그러나 그런 사물만 남았을 뿐 사람살이는 무상한 것. 34년 세월은 42가구였던 마을의 상이용사 가족을 18가구로 줄여 놨다.

용사촌의 최도한(78) 전 회장은 "친형제처럼 오손도손 지내던 동지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거나 자녀들을 따라 이사를 가 동네의 주인이 많이도 바뀌었다"고 했다.

여전히 마을에 사는 사람은 상이용사 10가족과 유족 8가정. 나머지 집은 일반인들이 사 살고 있다는 것.

휠체어나마 부인의 도움을 받아야 움직일 수 있다는 김수용(74)씨는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젊은 시절에 동지들과 한가족처럼 애환을 함께 해 온 동네라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원주 전투에서 두 다리를 잃어 언덕이 가파른 동네 나다니기가 어렵다는 김씨는 "방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혈압·당뇨 등 중병이 깊어졌다"면서 "전동 휠체어를 구해 동네 나들이라도 자유롭게 하면서 남은 동지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게 남은 소원"이라고도 했다.

◈이젠 18가구만 남아

23세 때 동부전선 전투에 참가했다가 한쪽 다리를 잃었다는 김동보(75)씨는 힘든 상이용사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공동 포대 공장의 추억에 묻혀 있었다.

제때 납품하려고 온 가족들이 밤샘 작업하며 얘기꽃을 피웠던 그 시절이 그립다는 것. 부인 배다란(68)씨도 "남편의 평생 투병으로 힘들게 살았지만 이 공장 덕분에 7남매를 모두 키워 출가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조상곤(76)씨는 "마을 가운데에 80평 크기로 세워진 포대 공장은 용사촌의 자랑이고 희망이었다"고 했다.

은행용 동전 포대, 군용 모래 포대 등을 만드는 이 공장은 보훈연금 제도가 부실하던 옛날 용사촌 가족들의 유일한 생계 터전이었다는 것. 이들은 그러면서 1975년 세워진 공장이 운영난에 빠진 것을 못내 안타까워 했다.

5년쯤 전부터 일거리가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이다.

◈집 낡아 비 주룩주룩

낡아버린 주택을 그냥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일 또한 힘겹다고 했다.

지은 지 34년이나 되다보니 허름한 고가같이 돼 버렸을 뿐 아니라 옛날식 좁은 방, 재래식 화장실, 옛날형 부엌 등 아예 새로 지어야 할 형편이지만 소방도로조차 없어 30여채는 개축 허가가 안난다는 것. 김재봉(74)씨는 "벽돌을 쌓아 지은 집이어서 더 심하게들 낡았다"며 "비만 오면 곳곳에 물이 새고 낮에도 어두침침해 불을 켜야 살 수 있을 지경"이라고 했다.

더욱이 동사무소 김연달(43) 사무장은 "남은 상이용사 10명 중 고항진(70) 회장 등 4, 5명이 또 고령과 부상 후유증 등으로 장기 투병 중이어서 요즘 용사촌 분위기는 상당히 침울하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이 분들에게 다시 한번 뭔가 보답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보였다.

강병서기자 kbs@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