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기증은 가장 숭고한 봉사

입력 2003-06-05 15:55:10

"제 신장 하나로 한 사람의 목숨을 살렸다는 생각을 하고는 스스로 놀랐습니다.

아, 나에게도 남과 나눠 가질 것이 있구나 하는 느낌,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홍영기(50.대구 팔달동)씨는 TV 자선 프로그램을 통해 장기 기증에 눈뜬 뒤 1997년 1월 만성 신부전증 고3년생에게 자신의 왼쪽 신장을 기증했다.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신장을 준 '순수 기증자'인 것.

▨생명을 나누는 사람들

"평생 혈액 투석으로 생명을 연장해야 하는 환자들을 보고는 너무 딱해 눈물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라도 나서서 살리려 애써 보자는 생각이 들었지요".

이식에 적합한 환자가 발견됐으니 수술을 서두르자는 통보가 왔다.

장기기증 신청을 한지 한 달만의 일. 그 순간 사업때문에 미뤄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환자가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말.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과 생명을 나눠 가질 18세 고3 남학생과는 수술 받을 서울 한양대병원에서 처음 대면했다.

그 학생의 어머니는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이미 자신의 신장을 남에게 기증했다고 했다.

그런 경우에 약간의 우선권이 주어지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아들을 살려 줬다며 감사해 하는 아이의 어머니를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감을 느꼈습니다.

저 역시 수술 후에 건강에 아무 지장 없고 마음은 늘 즐거워졌습니다".

환자가 이식 가능한 적정 기증자를 만날 확률은 약 2만분의 1. 전국에 수십만명 있는 만성 신부전증 환자들 중 그런 행운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겨우 한 달에 10여명뿐이다.

홍씨는 수술 이후 자신의 신장을 받았던 청년과 연락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건강하게 사는지 몹시 궁금하지만 부담스러워 할까 봐 일부러 연락을 않는다는 것. 그저 밝고 인정 넘치는 청년으로 커주기만 바란다고 했다.

▨새생명 나눔회

그 후 홍씨는 자신의 다른 장기도 이웃과 나누기로 서약했다.

그의 '장기 기증 등록증' 뒷면엔 사망했을 때 신장.각막.간장.췌장은 물론 시신 모두를 기증하겠다는 체크표가 돼 있었다.

그는 같은 해 10월쯤 30명으로 '새생명 나눔회 대구.경북 모임'을 결성했고 지금은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 모임은 신장.골수 등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나눠줬거나 나눠받은 이들의 모임. 대구.경북에만 50여명, 전국에는 1천여명이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종교인, 사업가, 주부, 회사원, 공무원 등 직업이 다양한 20~50세 사이의 사람들이 생명을 매개로 만남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

홍씨는 요즘 회원들과 함께 장기 기증 동참 홍보에 정열을 쏟고 있다고 했다.

대구.구미.경주.포항.안동 등에서 일년에 4차례 열리는 캠페인에 참가하고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 사람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회원들과 함께 곧바로 달려가기도 한다.

그렇게 달려 가봐야 돌아 오는 것은 대부분 욕설. 장기 기증 얘기를 꺼내면 들으려는 것은 보호자 열 사람 중 한 사람이 겨우 될까말까 할 정도라고 했다.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뚫고 그 사이 이룬 성과는 컸다.

회원들은 2천여명으로부터 임종 때 신장을 기증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냈고, 시신 6구를 의과대학 해부용으로 기증받기도 했다.

▨대구에 만든 인공신장실

새 생명 나눔회는 재단법인 '사랑의 장기 기증운동 본부' 산하 단체. 대구경북본부의 새생명 나눔회는 결성 직후부터 무료 혈액투석 병원 만드는 일에 매달렸다.

장기 기증 참여자를 늘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당시 전국 13개 장기기증운동 지역본부 중 서울.인천.부산에만 갖춰져 있던 무료 혈액투석병원을 대구에도 여는 일이 급했던 것.

이 병원은 그 4년 후인 2001년 5월 '사랑의 인공신장실'(상인동)이란 이름으로 대구에 탄생했다.

홍씨는 그때 넉달여간 무보수로 병원 인테리어를 맡기도 했다.

"이 병원에서 늘 혈액투석 받던 이가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곧이어 숨졌다는 얘기가 들려 옵니다.

안타까울 때가 한두번 아니지요. 실천하기 힘든 일이긴 하지만 완치가 힘든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는 분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홍씨가 이렇게 애정을 기울이는 이 인공신장실에는 홀몸노인 등 생활이 어려운 만성신부전증 환자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현재 65명의 환자들이 투석 받고 있고, 투석비 2만5천원과 약값은 본부에서 부담한다는 것. 환자용 무료식당도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사랑의 장기 기증운동 대구경북 본부 권영식(65) 본부장은 "투석 환자 65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 신장이식 수술 희망자가 15명밖에 안됐다"고 했다.

수술비를 댈 능력이 없기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권 본부장은 "장기 기증 캠페인뿐 아니라 중증 환자들에 대한 수술비 지원도 절실하다"고 안타까워 했다.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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