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 해인사 원당암은 가야산의 푸르름을 한껏 토해내고 있었다.
원당암은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 스님이 주석 하신 곳이다.
사리를 모신 토방은 물론 요사채, 영단, 마당에 이르기까지 온통 큰 스님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몇 해전 새해를 맞아 '똥자루 안고 고생 많다'며 빙그레 웃으시던, 누님같이 자그마한 큰스님의 모습이 새삼 그리워지는 곳이다.
묵언실 앞마루에 걸터앉아 화두에 들어 봤다.
화두는 커녕 있지도 않은 누님 생각만 자꾸 키워지고 있었다.
한 열흘 전 불현듯 떠올랐던 상념을 제법 근사한 시나 되는 양 메모했던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탓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은/저만큼 멀어져 있고/애들은 따라나서지 않는다.
홀로선 고목은/손짓 할 힘조차 없어/바람만 기다린다.
목이 긴 누님은/오늘도 사슴처럼/눈만 껌벅거린다'
이 땅의 오십대 중반 누님들의 삶을 어렴풋이 떠올려 본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은커녕 천덕꾸러기로 자라나 오늘날 어머니가 된 우리 누님들은 시간만 나면 자식과 함께 얘기도 하고 같이 다니고 싶어한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진 애들은 어머니와 함께 하기보다는 혼자이고 싶어하고 컴퓨터를 더 즐긴다.
순종만 배운 탓에 남편의 잘잘못에 대해 옳게 따져 보지도 못하고 기어살던 누님들이 이제 좀 목소리라도 내보려하나 쑥스럽기 그지없고, 요새 젊은것들이 본받을까 두렵고 부끄러운 생각에 고개 숙인 누님들이다.
어쩌다 남편이란 사람이 '고생했다, 사랑한다'고 말을 건네 오거나 생일날 편지나 장미꽃 한 송이라도 보내면 '이 양반, 미쳤나'며 외면해 버리고는 눈물 글썽이는 누님들의 그 속마음을 어찌 모르랴.
'이놈, 누님도 없는 놈이 무슨 누님 타령이냐' 혜암 스님의 '할'소리에 깨어나 보니 스무살 배기 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어허 이 딸놈은 50대 중반에 어떤 모습의 누님이 되어 있을까? 부처님 나라에 계시는 혜암 스님께 여쭤보고 싶은 마음을 숨긴채 빙그레 웃고 말았다.
권대용 수필가·달성군 부군수
댓글 많은 뉴스
이진숙·강선우 감싼 민주당 원내수석…"전혀 문제 없다"
"꾀병 아니었다…저혈압·호흡곤란" 김건희 여사, '휠체어 퇴원' 이유는
첫 회의 연 국민의힘 혁신위, "탄핵 깊이 반성, 사죄"
방위병 출신 안규백 국방장관 후보자, 약 8개월 더 복무한 이유는?
전국 법학교수들 "조국 일가는 희생양"…李대통령에 광복절 특별사면 요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