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누님 생각

입력 2003-06-04 09:35:19

5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 해인사 원당암은 가야산의 푸르름을 한껏 토해내고 있었다.

원당암은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 스님이 주석 하신 곳이다.

사리를 모신 토방은 물론 요사채, 영단, 마당에 이르기까지 온통 큰 스님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몇 해전 새해를 맞아 '똥자루 안고 고생 많다'며 빙그레 웃으시던, 누님같이 자그마한 큰스님의 모습이 새삼 그리워지는 곳이다.

묵언실 앞마루에 걸터앉아 화두에 들어 봤다.

화두는 커녕 있지도 않은 누님 생각만 자꾸 키워지고 있었다.

한 열흘 전 불현듯 떠올랐던 상념을 제법 근사한 시나 되는 양 메모했던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탓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은/저만큼 멀어져 있고/애들은 따라나서지 않는다.

홀로선 고목은/손짓 할 힘조차 없어/바람만 기다린다.

목이 긴 누님은/오늘도 사슴처럼/눈만 껌벅거린다'

이 땅의 오십대 중반 누님들의 삶을 어렴풋이 떠올려 본 것이다.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은커녕 천덕꾸러기로 자라나 오늘날 어머니가 된 우리 누님들은 시간만 나면 자식과 함께 얘기도 하고 같이 다니고 싶어한다.

그러나 머리가 굵어진 애들은 어머니와 함께 하기보다는 혼자이고 싶어하고 컴퓨터를 더 즐긴다.

순종만 배운 탓에 남편의 잘잘못에 대해 옳게 따져 보지도 못하고 기어살던 누님들이 이제 좀 목소리라도 내보려하나 쑥스럽기 그지없고, 요새 젊은것들이 본받을까 두렵고 부끄러운 생각에 고개 숙인 누님들이다.

어쩌다 남편이란 사람이 '고생했다, 사랑한다'고 말을 건네 오거나 생일날 편지나 장미꽃 한 송이라도 보내면 '이 양반, 미쳤나'며 외면해 버리고는 눈물 글썽이는 누님들의 그 속마음을 어찌 모르랴.

'이놈, 누님도 없는 놈이 무슨 누님 타령이냐' 혜암 스님의 '할'소리에 깨어나 보니 스무살 배기 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어허 이 딸놈은 50대 중반에 어떤 모습의 누님이 되어 있을까? 부처님 나라에 계시는 혜암 스님께 여쭤보고 싶은 마음을 숨긴채 빙그레 웃고 말았다.

권대용 수필가·달성군 부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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