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질환자 돕는 대구 장미회

입력 2003-05-01 11:40:22

대구 대명8동 '생명의 전화' 대구지부 사무실 강당. 네번째 토요일이던 지난달 26일 오후 이 강당은 손님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매월 이날 이곳을 정기적으로 찾는 이들은 간질환자와 그 가족들. 오래 묵은 환자들이라 잘 아는 만큼 진료 속도가 빨랐다.

환자들끼리도 반가워하며 안부를 물었다.

영천.고령 등 멀리서 온 사람도 적잖았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간질환자 진료는 거의 무료나 마찬가지. 한달 회비로 4천원을 내면 한달분의 약을 무료로 받아갈 수 있다.

한마디로 간질환자의 세상이 별도로 마련된 셈이라고나 할까?

이 일을 하는 주체는 사단법인인 대구 장미회(회장 정기열)이다.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 1989년. '생명의 전화' 대구지부 원장이기도 한 영남대병원 신경과 정성덕(63) 교수가 기회를 만들었다.

정 교수는 30여년 전 서울 세브란스병원 레지던트 때 간질환자 무료진료와 인연을 맺은 뒤 1989년 대구 서성로교회에 간질환자 무료진료소를 열었다.

당시 서울에서 이미 많은 활동을 하던 '장미회'의 뿌리가 대구로까지 이식 확산된 셈이었다.

장미회 본회는 미국인 로빈슨 선교사와 유재춘 목사가 간질환자들의 진료 및 경제적 지원을 위해 1965년 인천기독교사회관에 설립했고 현재는 전국에 59개의 위탁 진료소를 운영 중이다.

1989년에 정 교수가 대구 진료소를 열 때만 해도 여건은 무척도 척박했다고 했다.

동참 의사라고는 자신뿐이어서 혼자 하루 70~100명의 환자를 돌봐야 한 정도였던 점은 약과. 정작 큰 고통 속에 살던 것은 환자들이었다.

당시 간질은 '평생 낫지 않는 병' '집안 대대로 유전되는 천형'으로 오해됐다.

병 못잖게 무서운 것이 사회적 편견이었던 것.

그때문에 '병 가진 집안'이라는 소문이 날까 두려워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조차 너나 없이 간질을 쉬쉬했다.

"우리는 어차피 사회에 적응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환자들 사이에 보편화돼 있었다.

발작이 소문 나 직장까지 잃고 전전해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시집 식구들에게 숨기느라 불안에 떠는 이도 있었다.

정성덕 교수는 기자에게도 간질에 대한 오해부터 풀어 주려고 애쓰는 듯했다.

매년 간질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한 세미나를 한 차례씩 열고 있다고도 했다.

"현재까지도 간질의 발병 원인은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뇌병변 등 후천적 원인이 10%, 유전적 원인이 20% 가량 되지요. 나머지 70%가 원인 불명입니다.

그러나 약을 꾸준히 먹으면 병의 진행을 얼마든지 억제시킬 수 있고 완치까지도 가능합니다".

'장미회 진료소에 가면 간질을 고쳐 준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10여년 사이 진료소 방문 환자가 500~600명으로 늘었다.

교회에 처음 만들었던 진료소를 옮겨 1992년 확장 개소한 생명의 전화 진료소의 보관 진료차트는 이미 600장을 넘었다.

이곳에서는 영남대 약학대 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영남대병원 신경과 의사들이 의료진으로, 생명의 전화 사회복지사들이 도우미로 활동하고 있다.

또 환자가 늘자 장미회는 2001년 서문교회에도 또하나의 진료소를 열었다.

이 진료소는 동산병원팀이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나아가 장미회는 올해 말 간질환자 치료를 돕기 위해 네팔로도 의료진을 보낼 계획이라고 정 교수가 전했다.

간질을 앓는 환자들은 국적과 관계 없이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때문이라고 했다.

이같은 장미회의 뒤에는 소리 없이 움직이는 후원회가 있다.

환자가 늘면서 많은 재원이 필요해지자 1999년에 이 후원회가 조직된 것. 의사.변호사.사업가 등 15명으로 구성된 후원회는 매년 정기.특별 회비로 1천만원을 모아 간질환자 치료를 지원한다.

후원회는 또 간질 수술도 지원해 몇몇에게는 아예 새 삶을 선사하고 있다.

김모(17.의성)군이 대표적인 예. 부모 얼굴도 모른 채 고물상을 하는 큰아버지 손에 자라온 김군은 지난 겨울방학 때 갑자기 쓰러졌다.

간질 수술 과정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뇌종양까지 발견돼 모두 깨끗이 수술 받았다.

전체 수술비 중 1종 의료보호로 감면되고 남은 300만원을 후원회가 맡았다.

"불쌍한 아이한테 평생 못잊을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군의 큰아버지는 김군이 수술 후 전보다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고마워 했다.

후원회는 김군 다음으로 한 40대 부부에게 간질 수술을 해 주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다.

"환자들이 장미처럼 스스럼 없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자는 뜻에서 장미회라는 이름이 탄생됐다고 합디다.

이곳에서 약을 타 가는 환자들이 장미처럼 자신감을 갖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 가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들 하지도 않습니까?" 정성덕 교수는 생활이 어려운 간질 환자라면 장미회가 모두 껴안을 것이라고 했다.

연락처 053)475-9193.

최병고기자 c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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