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에 문중이 과거의 틀을 벗지 못한다면 역사적·유교문화적 의미에서 전통을 오히려 퇴색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번 일을 결정하게 됐습니다".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안동 도산서원 동광명실과 장판각에 보관해 오던 퇴계선생 문집과 친필서한문, 판각 등 유품을 국학진흥원에 위탁기증을 결정하는데 앞장선 퇴계선생 차종손 이근필(73·사진 앞쪽)옹. 퇴계선생 유품이 서원 밖으로 나온 것은 개원 500년 만의 일이다.
이 옹은 16일 장판각에서 먼지쌓인 판각 1천여개를 꺼내 마지막으로 외출시킬 준비를 끝내고는 퇴계선생 친필서적인 '선생수적'(先生手蹟)과 '사문수간'(師門手簡) 14책을 펴놓고 깊은 상념에 잠겼다.
지난 500년 동안 문집이나 유품을 서원 밖으로 반출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서원규칙이 이어져왔지만 이같은 조상들의 뜻을 거스르고 역사적 흐름과 후학양성, 퇴계선생의 사상과 학문의 올바른 연구작업이라는 대의에서 이번 일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옹은 "이제 광명실이 너무 낡았고 문중마다 고서적과 유물들이 도둑맞는 등 관리문제도 심각하다"며 "특히 선생의 유품을 밖으로 알려 선생의 사상과 학문연구에 결정적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외출결정 이유를 밝혔다.
특히 그는 82년 정부가 문화재 지정을 위해 문집을 서울로 가져올 것을 요청할 때도 서원규칙을 들어 거부했고, 정신문화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 등 연구기관의 숱한 요청에도 문을 굳게 닫아두었던 광명실이기에 더욱 뜻깊은 결정이었다.
이번에 국학진흥원으로 옮겨진 자료중 '퇴계선생문집초고본' 40여권과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내사본(內賜本)' 100여책, 명나라의 역사를 다룬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70여책, '춘추좌전구두직해(春秋左傳句讀直解)' 70여책 등은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판본들이다.
이근필 옹은 "선생이 자필로 쓰신 서적들과 문집 초고본은 국학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었으면 한다"며 "후학들과의 토론을 통해 선생의 사상적 변화와 배경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고 힘줘 말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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