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군 대미항전 결과는

입력 2003-03-28 09:16:22

한국문화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21세기에는 우리의 정체성을 민족주의라는 낡은 개념을 버리고 문화라는 개념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우리 문화의 흥미로운 대목을 골라놓은 '21세기에도 우리 문화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지영사 펴냄)는 소장학자 21명의 글을 실을 책이다.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역사속에서 하나씩 찾아가면서 누구나 쉽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게 강점이다.

▲우리 문화속에 남아있는 몽골문화는?=아이들이 태어나면 엉덩이에 푸른 반점이 생기는 '몽골반점'이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 생활 곳곳에 몽골문화의 잔류가 너무나 많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은 몽골에 끌려갔던 고려 공녀의 한을 일컫는 말이고, 조선조 우리 여인네들의 정절 수호의 상징으로 간직하던 장도(粧刀)도 몽골풍속에서 기인하였다.

몽골부인들의 외출복이었던 족두리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결혼식이나 의식에 사용됐고, 조선시대나 요즘 어린 여자아이의 머리를 갈래지어 땋는 방식도 몽골 풍속에서 전해진 것이다.

또 생선탕이나 송편, 인삼주 등도 몽골의 음식문화다.

설렁탕과 설렁탕에 간을 맞추기 위해 소금을 넣는 것이나 개고기를 먹고 조리하는 방식도 몽골에서 시작됐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흰옷만 입었는가?=전혀 그렇지 않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주로 치자색 담황색 등이 들어간 색깔 옷을 널리 입었고, 조선 세종때는 황색 옷이 염색이 쉽다는 이유로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우리가 백의를 즐겨 입은 이유에 대해 염색기술의 부족, 유교적 허례의 영향 때문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않다.

이것은 일제가 우리 민족의 미개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연구해 퍼트린 식민사관이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의 상복은 흰옷이라기보다는 황색 옷이었기 때문이다.

백색을 즐겨입은 이유는 청렴, 결백, 청빈, 살신성인을 추구해온 우리 민족의 정신성에 있다.

백색이 부정과 불의에 항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선비가 지향해야 할 정신을 대변하는 색으로 여겼고, 이것이 민간에 널리 퍼졌다.

예전 왕실이 부정과 불의를 저질렀을 때 젊은 선비와 충신들이 농성하면서 입던 옷색깔이 흰색이었다.

▲조선시대 남성들도 귀고리를?=남자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하는 것이 요즘만의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놀랍지 않은가.

조선 초기에는 귀족 자제들이라면 누구나 귀를 뚫고 귀고리를 했다.

귀고리는 원래 왕실의 권위를 알리는 차원에서 점차 일반 사대부 자제들, 특히 남성들의 사치와 과시수단으로 널리 애용됐고, 조선중기에는 일반적인 풍속이 됐다.

선조가 남자들에게 귀고리 착용을 금지하는 조서를 내릴 정도였고, 임진왜란 때 죽은 왜군과 조선군을 구분하던 방식도 귀고리와 귀를 뚫었는지 여부였다고.

▲미국과의 싸움, 신미양요=이라크 전쟁이 한창인 요즘, 조선과 미국의 역사적 접촉과정이 새삼 관심을 끈다.

1853년 부산 앞바다에 미국 포경선 한척이 표류했는데,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관리들이 그 배에 올라간 것이 미국과의 첫 만남이다.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않아 미국선원들은 '아메리카'라고 외쳤고, 관리들은 그 발음을 듣고 '며리계'라고 중앙정부에 보고했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이라크전에서도 용맹을 떨치는 미 해병대가 강화도에 상륙, 난공불락의 자연요새로 알려진 광성보에 주둔하던 조선군을 1시간여 만에 패퇴시켰다.

그 전투로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던 데 반해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에 지나지 않았다.

마치 이라크와 미국의 전쟁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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