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지 24일이 지났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아픔과 고통의 기억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중앙로역은 참상의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새까맣게 변한 벽과 기둥, 뼈대만 남은 광고판, 실종자들의 전단지, 국화꽃, 진한 향내가 그것을 말해준다.
실종자가족들은 지난달 23일 이후 밤·낮없이 이곳을 지켰왔다.
벌써 18일째. 꽃샘추위도 비·바람도 실종자가족들을 이곳에서 내몰지 못했다.
하룻밤을 이들과 지샜다.
△참사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지난 12일 밤 9시쯤 중앙로역 지하1층. 실종자가족들은 삼삼오오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격랑 뒤 파고가 줄어들 듯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였다.
일부는 앞의 대형 TV에서 나오는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속보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이때 실종자가족 대책위원회 윤석기(38) 위원장이 나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며 국립수사과학연구소 등에 의해 신원이 확인된 시신 20여구를 가족들에게 어떻게 통보할지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그는 "지금까지 대구시를 상대로 잘 버텨왔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원이 확인된 시신 20여구를 두고 실종자가족들의 의견이 갈라질까 우려하는듯했다.
하지만 실종자가족들은 "개별확인이 되면 그 가족들은 더 이상 이곳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며 신원 확인된 사체의 개별확인에 강하게 반대했다.
일부에서 "가족들의 애타는 심정을 고려해 개별통보를 허락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반대의견에 바로 묻혔다.
'개별적으로 신원을 확인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의견이 집약되자 실종자가족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내를 잃은 신모(37·대구 신서동)씨는 "개별적으로 신원을 확인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장지는 망자의 권리인 만큼 추모공원에 아내를 묻을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다"고 했다.
△잠 못 이루는 실종자가족들=밤 11시쯤 되자 실종자 가족들은 시민회관으로, 집으로 자리를 옮겼고 중앙로역 지하 1층에 남은 실종자가족 20여명은 바닥 위에 담요를 깔고 온풍기를 준비하는 등 잠자리를 준비했다.
담요를 등에 걸치고 컵라면을 먹던 유기복(67·대구 방촌동)씨는 "막내 아들을 잃었다"며 "옷 갈아입을 때만 집에 가고 18일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씨는 "처음엔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사람이 50여명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많이 줄었다"고 했다.
박연옥(65·경북 영천)할머니도 지난달 23일부터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박 할머니는 주위에서 몸을 생각해서 시민회관에 가서 밤을 보내라는 권유에도 "모두 떠나면 누가 지키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요즘엠 관절염이 심해져 매일 침을 맞고 파스를 붙인다는 것. 할머니는 "중앙로에서 지하철 운행 중단 홍보물을 시민들에게 나눠주느라 저녁 시간을 놓쳤다"며 "빵과 우유로 때웠다"고 했다.
자정을 넘기자 일부 실종자가족들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덮고 누웠지만 쉽게 잠을 청하지 못하는 듯했다.
조그만 소리에도 벌떡 일어나 무슨 일인지 확인을 한 뒤에야 드러눕기를 반복했다.
변길연(30·대구 산격동)씨는 "모두 선잠을 잔다"며 "자는 도중 순찰 도는 경찰의 발자국소리에도 놀라 깨곤한다"고 했다.
실종자 가족 이해암(55·대구 신천동)씨는 마스크를 한 채 누워있었는데 이유를 묻자 "공기가 나빠 자고 나면 목이 따갑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달 23일 이곳에 처음 왔을 때에 비하면 매우 좋아졌다고 했다.
이씨는 "처음 며칠동안은 매캐한 냄새에 목이 따가워 밥도 못 먹었다"고 했다.
아내를 잃은 김한식(58·대구 신천동)씨는 아들 병철(28)씨, 석달전 시집간 딸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씨는 "집에 가면 더 불안하다"며 "밤새 불안감으로 뒤척이다 새벽 4, 5시가 지나야 겨우 눈을 붙인다"고 했다.
병철씨는 "어머니의 정황증거가 뚜렷하지 않다"며 "만약 법적 사망자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어떤 행동을 할지 나도 모르겠다"고 했다.
딸 지은(25)씨를 잃은 윤근(57·대구 산격동)씨는 "임용고시 준비를 위해 학원에 가던 중에 사고를 당했다"며 "시신을 찾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않는다"고 했다.
그는 대책위원으로 활동 중인데 "실종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모의 심정을 토로하다 보니 대책위원이 되었다"고 했다.
윤씨는 잠이 오지 않는지 딸의 사진이 붙여진 전단지를 상기된 표정으로 바라보기를 거듭했다.
새벽 3시가 지나자 서로 위로하며 얘기를 나누던 실종자 가족들은 각자의 잠자리로 돌아갔지만 몸을 뒤척이는 모습은 여전했다.
장재혁(26·경산대 보건학과 휴학)씨는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 별로 춥지 않아 다행이다"며 담요를 머리까지 끌어올렸다.
이튿날 아침 8시쯤.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더니 시민회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실종자가족들을 위한 아침식사를 가져왔다.
실종자가족들은 잠에서 덜 깬 듯 피곤하고 지친 표정으로 겨우 밥과 국을 받았다.
같은 시각. 중앙로는 두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로 봄 햇살이 비쳤고 출근길 시민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직도 참사가 진행중인 중앙로역 지하1층과는 완연히 다른 세상이었다.
이창환기자 lc156@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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