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2003-헌혈

입력 2003-01-23 13:19:56

"오늘따라 헌혈 부적격 사유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네요. 남자분들은 대부분 어제 저녁 과음을 하신 것 같고 여자분들은 10명 중 7, 8명이 혈액비중에 미달입니다".

겨울날씨답지 않게 포근했던 지난 주말 오후 대구 동성로 엑슨 밀라노 부근으로 나온 가두 헌혈차량. 익숙한 솜씨로 신체검사를 맡아보던 담당간호사 권영애(37)씨는 "방금 전 술냄새 풀풀 풍기는 20대 청년을 억지로 달래서 보냈다"며 "그래도 성의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대한적십자사 대구·경북혈액원의 가두헌혈 차량은 모두 7대. 이 중 스케줄에 따라 동성로를 찾는 차량은 마치 만선을 기대하는 어부들처럼 다소 들뜨기도 한다고 속내를 밝혔다.

동성로는 혈액원에서 최고의 명당자리로 손꼽히는 곳으로 개인헌혈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한 곳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주변 상인들과 '자리'다툼 신경전을 벌일 때도 있다고 한다.

혈액원은 중구청에 협조 공문을 보내는 등 잔뜩 신경을 쓰고 있다고 귀띔했다.

친구 3명과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헌혈차량을 찾았다는 강성림(고2)양은 "보통 주사바늘보다 훨씬 굵어보이는 바늘이 무서웠지만 나 혼자 헌혈에 성공하고 보니 우쭐한 기분이 든다"며 "친구들 사이에 주민등록증이 나오기전에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헌혈이라는 말이 있다"고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동성로에서 5분거리의 대구시 중구 봉산동 대구 중앙 헌혈의 집은 주변의 간판숲에 묻혀있어 기성세대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 그러나 헌혈을 자주 하는 젊은층에게는 알려질만큼 알려진 곳이다.

옛 중앙초등학교부지에 자리잡았다가 옮겨와 새단장했다.

가두차량의 전혈헌혈(적혈구, 백혈구, 혈장, 혈소판 등 혈액의 모든 성분을 헌혈)과 달리 성분헌혈(혈액의 성분 중 혈장 또는 혈소판 등만 헌혈)을 하는 사람이 자주 찾는 곳. 혈액원내에서는 이름만 대면 금방 떠올릴 단골 인사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기도 하다.

여느 카페처럼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컴퓨터를 하거나 앉아서 쉴 수 있는 휴게소처럼 꾸며 놓았다.

한쪽 벽면엔 헌혈 100회 이상을 기록한 사람의 상징인 손형상이 전시돼 방문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해 헌혈 100회를 달성한 임채환(30)씨는 이날도 헌혈의 집을 찾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임씨는 "모아두었던 헌혈증을 급히 필요로 하는 주위사람에게 선뜻 내어 줄 수 있을 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면서 "남도 돕고 내게 생길지 모르는 어려움에 대비한다는 생각에 요즘도 한달에 2번씩 정기적으로 헌혈의 집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이 29번째라는 대학생 김홍재(25·영남대 전자과)씨는 "고교때 단체로 헌혈을 한 게 계기가 되었는데 건강에 자신이 있기 때문인지 헌혈을 하고나면 기분도 좋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역에서 채혈한 혈액은 일단 혈액원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부터 더욱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진다.

혈소판 농축액은 보관기간이 5일, 적혈구 농축액은 35일에 지나지 않아 혈액원은 품질관리에 바짝 신경 써야한다.

우선 공급과에서 일일이 혈액 바코드를 입힌후 입고하면 검사과에서 ABO혈액형, B형 간염항원, C형 간염항체, 간기능검사 등이 진행되며 동시에 제제(製劑)과에서 혈액을 분리한다.

분리된 혈액은 혈액냉장고나 급속냉동고에서 혈액의 종류마다 적정한 온도를 유지한 상태에서 보관하다 각급 병원으로 공급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혈액원 김재활 팀장은 요즘같은 동절기(12월~2월)에는 헌혈자수가 급격히 줄어 수혈용 혈액수급마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 한달 대구·경북지역 헌혈자수만 보더라도 1만6천46명으로 2001년 같은 기간 1만7천68명보다 6.3%나 줄었다는 것.

이에 따라 지역 자체적으로 혈액조달이 어려워 지난해 12월과 1월들어 20일 현재 환자 수혈용 적혈구 농축액을 비롯 1천49 유닛(1 Unit은 320~400㎖ 용기 기준으로 1명으로부터 1회 채혈한 양)의 혈액을 다른 지역에서 긴급 조절용으로 공급받고 있는 실정이라고. 이처럼 타지역에서 조달한 혈액은 2001년 총 6천520 유닛, 지난해엔 이보다 2배가 늘어난 1만3천106유닛에 달하고 있다고 밝혔다.

군복무 시절 월남전에 참전, 전장에서 한방울의 피가 전우의 생명을 살리는 생생한 체험을 했다는 성창본(54)씨는 "헌혈은 생명의 소중함과 남을 위한 이웃사랑의 실천을 직접 느껴보는 나눔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며 "자기신체의 일부인 장기나 골수 등을 기증하는 사람들에 비한다면 작은 사랑으로 큰사랑을 베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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