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오후

입력 2003-01-21 09:34:02

그는 머리로는「아니」라고 말하지만

가슴으로「그렇다」고 말한다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에는「그렇다」고 말하고

선생에게는「아니」라고 말한다

호명을 받고 그가 일어서니

모든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갑자기 그는 미친 듯이 웃는다

그리고 흑판에 쓰여진 모든 것을 지운다

숫자와 낱말을 날짜와 이름을

문장들과 함정들을

그리고 선생의 위협을 무릅쓰고

우등생들의 조소에도 불구하고

불행의 검은 흑판 위에

온갖 색깔의 분필로

행복의 커다란 얼굴을 그린다

-자크 프레베르,「열등생」

전교조란 말이 생기기 훨씬 오래 전 프레베르는 인간성을 화석화시키는 교육 현실을 담담한 필치로 그려 보이고 있다.

그것도 가슴을 지닌 유머로 말하고 있다.

인간의 가치를 줄서기로 재단하는 사회에서는 머리는 있지만 가슴이 없는 것이다.

가슴이 없는 우등은 오만을 낳고 오만은 이웃들에게 깊은 상처만 안겨줄 뿐이다.

권기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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