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칼럼-문화와 예술

입력 2003-01-21 09:34:02

문화는 예술의 상위개념이다.

예술은 문화의 한 부분이다.

생각건대 이처럼 간단하고 명료한 관계도 없다.

예술은 정치 경제 학문 따위와 함께 문화를 이루는 한 단위다.

정치문화 경제문화 학문문화란 말을 쓸 수 있듯이 예술문화란 말도 성립된다.

아니 그렇게 불러줘야 한다.

체육문화 식문화 바둑문화 따위와 함께 그렇게 불러줘야 한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을 간혹 보게 된다.

문예진흥원 할 때의 문예가 바로 그런 예가 된다.

문예는 문화예술의 약칭이다.

문예라고 하면 문화가 예술을 수식하는 꼴이 되어 예술이 문화의 상위개념처럼 되어버린다.

앞뒤가 바뀐 셈이다.

내가 한 두어 번 이 억지스러움을 지적하여 문예진흥원에서 내는 기관지에 청탁을 받고 글을 쓴 일이 있었는데 청탁을 해놓고 그 부분은 삭제하고 싣지 않은 일이 있었다.

다 아다시피 지금도 버젓이 문예진흥원은 그 간판을 그대로 달고 있다.

이 글을 보게 되면 왜 그러는지 한마디 대꾸를 보내주었으면 한다.

문화에 여러 부분이 있듯이 예술에도 여러 부분이 있다.

크게는 고급예술과 통속예술이 있다.

요즘은 고급예술 속에도 통속적 대중적인 요소가 섞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일부러 그들 경계선을 헐어버리려는 경향까지 있다.

옛날(봉건군주시대)에는 예술에도 계급이 있었다.

아니 예술에 계급이 있었다고 하기보다는 계급에 따라서 향유한 예술의 질이 달랐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나 왕실에서 감상하는 음악과 일반 서민들이 감상하는 음악은 따로 있었다.

춤도 그랬다.

사대부의 안사람들도 내방가사라고 해서 즐기는 시가가 따로 있었다.

남성은 여기 손을 대지 못했다.

개화 이후 예술의(향유의) 계급성은 무너져갔다.

오늘날 어떤 예술은 누구만 즐기고 다른 예술을 누구는 즐기지 않는다는 일은 없다.

있을 수도 없다.

예술제작과 감상의 민주주의시대다.

따라서 예술의 격이 많이 저하된 부분도 없지 않다.

변두리예술(marginal art)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 예가 된다.

상가에 나붙은 간판이라든가 유리창에 드리워진 커튼이라든가 건물의 페인트칠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모두 이에 속한다.

실생활과 직접 연결되는 것들이다.

우리의 시신경을 부단히 자극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쾌적하게 잘 정리된 환경 속에서 사느냐 그렇지 못하냐가 문화수준의 높낮이를 재는 척도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얼마나 세련된 예술감각을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에 따라 이 변두리예술은 엄청난 차이를 드러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변두리예술은 사회성이 크고 따라서 매우 도덕적인 성격을 띤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한다.

어느 집에서 커튼을 바꾸기로 했다.

이웃집의 커튼 빛깔과 다시 비교해본다.

이 기회에 더 조화가 잡히는 빛깔과 천을 선택하도록 배려한다.

이웃과 상의도 한다.

이렇게 해서 주거를 공동으로 쾌적하게(아름답게) 가꾸어간다.

도덕이 남을 배려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게 바로 그 증거가 되리라. 우리사회에서는 이런 말은 아직 입 밖에도 내지 못 한다.

예술은 원래 난해하고 과도하게 세련된 데가 있다.

예술은 또 자유라는 공기를 숨쉬며 산다.

자유가 없는 곳에 예술은 없다.

예술의 이런 요소들은 모두 각박한 사회에서는 감당하지 못한다.

그 사회 자체가 너그럽고 평화로워야 한다.

옹졸하고 용렬하고 뭐든 흑백논리로 편가름하고 전투적이 되는 사회에서는 예술은 죽는다.

아니 그런 따위 용렬하고 흑백논리로 전투적이 되는 예술이 나올 수밖에는 없다.

문화는 예술의 상위개념이다.

자기를 의젓하게 그 위치로 앉혀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밑에서 많은 부분의 예술들이 다양하게 - 고급예술은 고급예술대로 통속예술은 또 그들대로 조금도 꿀리지 말고 자기를 표현해가야 한다.

세련되고 난해한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귀족적인) 것도 인간의 품위를 위하여 인간사회에서는 꼭 필요하다.

우리가 성숙한 사회를 가지려고 한다면 이 사회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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