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땅에는 꽃이피고

입력 2003-01-18 16:24:59

일요일에는 편안한 늦잠을 즐긴다.

긴 밤의 휴식이 은혜롭다고 할까. 모든 사물은 밤을 새우면 새 모습으로 하루를 열고 자기 몫을 다하기 마련이다.

나는 일요일 낮이면 집 근처에 있는 대학 캠퍼스로 산책을 나간다.

텅 빈 교정에는 교사 건물과 수목과 바위들이 무거운 침묵으로 졸며 앉아 있다.

교문 안 통로 여기저기에 걸려있는 학과 별 선전 현수막은 요란한 빛깔과 표어로 보는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다.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교정을 한 바퀴 돌아본다.

엄동설한의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

뛰고 있는 사람, 팔다리를 흔들고 있는 사람, 노목에 등을 쿵쿵 부딪치고 있는 사람….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운동하는 모습이 퍽 정겹고 한가로워 보인다.

이제 교정을 두 바퀴째 돌고 있다.

한 바퀴 돌 때는 눈 앞에 나타나는 사물만 보일 뿐이었다.

교정 군데군데 무리지어 서 있는 상록수와 낙엽수의 조화는 한 겨울의 정취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다.

크고작은 바위들의 배열과 축조, 연신 물이 고드름 사이로 치솟아 흐르는 분수대와 전통양식의 팔각정, 명언을 음각해서 틈틈이 세워 둔 큰 바위들, 이들은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서 어쩌면 미학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번에는 웬일인지 신입생 유치를 위해 달아 둔 현수막에서 뭣인가가 퉁겨져 나오고 있다.

'최고' '최첨단' '초고속'…. 이런 낱말들이 탄환처럼 날아와 몸에 박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런 단어에 친숙해진 현대인들의 처절한 몸짓이 언제까지 지속돼야 할 것인가.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 신속과 편리함 만을 추구하다 보면 종말에는 뭣이 돌아올 것인가. 괜히 몸이 오싹하고 불안해진다.

착잡한 심정으로 교정을 또 한 바퀴 돌고 있다.

서서히 자연의 섭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차츰 자연과의 혼교가 이뤄지는가 하면 은밀한 대화도 오가고 있음을 느낀다.

나무와 풀뿌리들은 죽은 듯 조용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그들은 혹한속에서도 햇볕에서, 바람속에서, 물과 흙속에서 새 봄을 창조할 구도며 생기며 온갖 색깔이며 향기를 얻어 내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다.

인생의 봄을 꽃 피우고자 하는 사람은 고난과 역경과 절망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뭣인가를 쌓아 올리며 땀을 흘려야 한다는 말을 살며시 귀띔해주는 것만 같다.

목련, 개나리, 진달래는 벌써 아기 젖꼭지 같은 꽃몽우리를 힘차게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는 저마다 나뭇가지에 티눈 같은 새싹을 달아 두려고 깊은 땅속에서 수분을 빨아 올리고 있지않는가. 텃새들은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이 나무 저 나무 옮겨 다니며 저들의 소식을 전하고 은근히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함이 없으면서 하지 아니함이 없는 자연의 생명력에 외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또 교정을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돌아본다.

문득 옛 친구들의 환영이 언뜻언뜻 눈앞을 지나간다.

잠시 멈춰 서서 높은 구름이 떠가는 겨울 하늘을 바라본다.

친구들 가운데 더러는 서울로, 시골로 흩어져 살고 있다.

또 몇 사람은 병석에 누워 있다.

비록 운수에 가리워 모습은 못보아도 그들의 마음은 하늘에 새겨져서 지금도 서로가 읽으며 즐거운 환담을 나눌 수 있다.

모두가 건강한 몸으로 이승의 그림자 힘차게 거느리고 삶의 기쁨을 오래도록 누렸으면 한다.

'하늘엔 별이 있고 땅에는 꽃이피고 사람에겐 사랑이 있다'. 나도 모르게 '괴테'의 시 한 구절이 불쑥 입에서 튀어 나온다.

불현듯 나의 자화상이 보인다.

석양놀이 붉게 물든 황야를 혼자서 뚜벅뚜벅 걷고있는 나의 모습. 이웃과 함께 울고 웃으며 영욕의 산맥과 애환의 바다를 건너온 나의 모습. 자꾸만 뒤돌아 보인다.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이 없기 때문이리라.

사람이 돌아갈 땐 자신의 업(KARMA)을 갖고 간다는데, 내가 지은 선업은 생각나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김규련(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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