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고이혼 시대'의 가족

입력 2002-11-27 15:09:00

선진사회를 규정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과잉사회'만큼 적절한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필요한 것보다'더 많이' 생산하는 곳이 선진국이고, 얼마나 많이 소비하는가가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곳이 선진국이지 않은가? 예전부터흘러 넘친다는 것이 항상 풍요와 여유를 상징하였으니 이러한 상식적 기준이 크게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젠가 한국무역협회가 발표한 '202개 지표로 본 대한민국'이란 보고서를 보면, 우리도 드디어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인상을 얻게 된다.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가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했고, 사교육비 지출도 세계 1위라고 하니 가히 정보화를 토대로 한 지식기반사회를 선도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도 있으련만, 첫 인상이 씁쓰레한 여운을 남긴다. 양달이 있으면 항상 응달이 있게 마련이듯이 압축성장의 그늘이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이혼율의 급성장이었다. 우리 나라는 인구 1천명당 2.8쌍이 이혼해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가 중 이혼율이 세 번째로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이혼율이 선진국의 지표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도 이제는 선진국에 진입한 것이 틀림없는가 보다. 현대화를 사회적 분화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이혼은 사회 분화의 정도와 속도를 거꾸로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이 통계는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우리의 가족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강렬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가치관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외부 환경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예컨대 오늘날 대부분의 남성들은 직업을 가진 여성을배우자로 원하지만, 부인이 남편보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거나 더 많이 버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한다.

만약 남성들이 여성에게서 경제적 이익만을 원하고 기존의 가부장제적 질서는 유지하고자 한다면, 부인에 대한 남편들의 기대가 지나칠 뿐만 아니라 시대착오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가족을 위협하는 가장 커다란 적은 '기대과잉'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는 상대방이 활동적이고 자립적이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전통적 가치에 순종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기대과잉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의 가장 커다란 기대는 다른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실현을 할 수 있다는 기대이다.

한때 "결혼은 선택이고, 직업은 필수이다"라는 말이 유행하였던 것처럼 오늘날에는 반드시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속박이 있다. 직업을 가진 여성은 부인을 평생 재정적으로 보살피는 남편의 지조와 충실성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오늘날 여성은 하나의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속박을 대가로 지불하고 자립과 해방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개인에게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립하라고 강요한다. 이것 역시 기대과잉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평범한 주부의 길을 걷겠다고 결정한 여성들은 사회로부터 뜻하지 않은 압박을 받게 된다. 자신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보통의엄마로서 아이를 키워가며 살아가겠다는 딸의 말을 듣고 오늘날 경악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한결같이 자신의 운명을 한 남자에게 맡기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고 열을 올릴 것이다. 그것은 부모뿐만이 아니다. 현대적 남성들은 그런 위험을 부담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직업을 가진 아내를 원한다.

현대인들은 이렇게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삶'은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자기이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해지다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법을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상대방에게서 경제적으로만 인정받고 인격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한다면, 가족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여기서 가족의 단순한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이없다면, 가족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혼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병이다. 이 병은어쩌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과잉기대'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른다.

이진우(계명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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