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주공 '아파트 잔치'

입력 2002-11-23 12:13:00

22일 오후 대구 용산동 성서주공아파트 6단지 중 공공임대 마을. 5, 6명의 할아버지들이 쌀쌀한 날씨에도 놀이터 한켠에 모여 새끼를 꼬고 이엉을 엮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짚이었지만 할아버지들의 손놀림은 능숙했던 예전 그대로였다.

30대 장정들은 할아버지들이 엮은 이엉을 날라 초가 지붕을 만들고 있었다. 6, 7명의 장정들이 만드는 초가지붕은 오후 2시에 시작될 마을 작품전을 더욱 푸근하게 꾸미기 위한 것. 놀러나왔던 어린이들은 이 일을 유심히 지켜보며 잔치가 시작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후 2시. 이번엔 마을 부녀회가 나설 차례였다. 아주머니들은 정성들여 마련한 돼지고기.김치.막걸리 등으로 잔치상을 차렸다. 그리고 464가구 1천200여명의 주민들이 다 함께 모이면서 잔치가 시작됐다.

이 마을 동네 잔치인 작품전이 열리는 것은 올해로 두번째. 초등학교 아동, 중고생, 주부, 연세 높은 어르신 등이 각자의 기량을 뽐내는 시화.그림.글씨.일기 등 40여점을 출품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구면". 전시장을 둘러보던 동네 사람들은 "모든 작품들이 한달 동안 노력해 만든 탓인지 우열을 가리기 힘든다"고 했다. 심사위원은 바로 이들 동네 사람들. 최우수작은 마음에 드는 작품에 이들이 붙힌 스티커 숫자로 결정된다고 했다. 23일 오후가 그 결정의 시간이다.

그러나 이날 모임은 꼭 이 작품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우순옥(52) 부녀회장은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서로 도우며 행사를준비하다 보면 정이 새록새록 쌓인다"고 했다.

행사가 바라는 것도 바로 이것. "이렇게 앉아 새끼를 꼬고 용머리도 만들자니 자꾸 북녘에 두고 온 아내생각이 나". 박재헌(86) 할아버지는 그러면서 기술이 옛날 같잖아졌다고 허허 웃었다. 초가 지붕을 만드느라 추운 날씨에도 이틀이나 '고생'했다는 것.이춘길(76) 노인회장은 "우리 전통을 어린 손자.손녀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 즐겁다"고 했다.

초가 지붕이 모습을 드러내자 학교 공부를 마친 어린이들이 몰려들었다. 신기해 하던 아이들은 한 아주머니가 "옛날에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살았던 집"이라고 설명하자 문득 일하던 할아버지들을 되돌아 봤다.

뭔가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얘기. 김희석(8)군은 "그림으로만 보던 것과 달리 초가집이 너무 아담하고 신기하다"고 했다. 할아버지들은 이 초가 지붕을 앞으로도 보전하면서 조롱박과 수세미도 올릴 것이라고 했다.

조병준(44) 관리사무소장은 "더불어 사는 동네를 만들자며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행사를 준비했다"고 했다. 서로 단절되기 쉬운 아파트가 살기 좋은 마을로 바뀐 것이었다.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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