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데스크-위기의 황금들판

입력 2002-11-08 15:25:00

막바지 가을걷이를 재촉하는 대구~안동 국도변 들녘을 보며 3년전 이맘때 전라도 지역을 여행할때 옆자리의 친구와 나누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운전을 하던 친구가 갑자기 황금들녘을 가리키며 "황금들판을 보면 어떤 느낌을 받느냐"고 물었다. 내가 "황금들판을 보면 왠지 생기찬 풍성함이 느껴져 마음이 푸근해진다"고 했더니, 그는 "바로 그것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 같은 도시인들은 황금들판을 보는 데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예술작품보다 더한 감동 줘

이 친구의 말인 즉슨 농민들이 만든 가을 황금들판은 사람이 빚어내는 어떤 예술작품보다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위안을 주기 때문에 공짜로 봐서는 안되고 구경값을 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영화관이나 음악회에 가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것처럼 도시인들도 황금들판을 보는 데 대한 대가를 농민들에게 지불한다면 어려운 농촌경제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럴듯한 논리라 여겨졌다. 그러나 차창 밖에 저절로 비치는 풍경을 보고 관람료를 매길 마땅한 방법도 없을 것 같아 빗물이나 공기가 우리에게 지극히 이롭지만 대가를 지불하지 않듯 그저 감사의 마음만 가지면 될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야기가 뇌리에 되살아나게 된 것은 2004년부터 쌀시장이 개방되면 가을의 풍성한 황금들녘이 훨씬 초라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사실 WTO 뉴라운드 협상에 따른 선진국의 쌀시장 개방압력에 대한 우리정부의 대응책은 쌀시장을 완전개방, 쌀생산을 감산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지난해 12월 발표한 신농업정책의 골자는 증산위주에서 고품질위주로 적정생산을 유도하고, 논농업직불제를 실시, 쌀 대신 콩과 같은 대체작물을 재배토록 해 농업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방법은 비교우위에 의한 농업축소정책의 연장이어서 결국은 쌀시장 개방후 시간이 지나면 이땅에 보리와 밀이 거의 사라 졌듯이 쌀농사도 대폭 감소해 황금들판의 모습도 크게 망가질 것이다.

쌀 감산정책에 대해 농가소득의 50%를 쌀농사에서 얻고 있는 농민들은 농민죽이기 정책이라고 반발하며 '우리쌀 지키기 걷기운동'을 벌이고 '쌀수입반대 천만명 서명운동'에 나섰다. 농업분야 전문가들과 환경단체들도 여기에 동참하고 있다.

농업전문가들은 쌀이 무너지면 농민들은 논에 사과, 배, 감 등 과수작물이나 소채작물을 심을 수밖에 없어 현재의 과잉생산을 더욱 부채질해 모든 농사가 다 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환경단체들은 환경친화적인 쌀농사가 수분저장.산소공급 등 환경을 보전, 우리삶에 기여하는 값어치는 쌀생산액의 4, 5배에 달하는 24조원 규모에 이른다며 쌀 감산에 적극 반대한다.

쌀농사 전망 어둡기만

그러나 쌀농사살리기의 전망은 어둡기만 할 뿐이다. 쌀농사를 살리자면 공산품 수출과 농산물 수입을 연계시키는 경제정책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불가능한데, 정책입안자나 행정관료들 중 농산물은 해외에서 사들여와 먹으면 된다는 수출의존 경제성장 지지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일반 국민들도 별 문제의식 없이 쉽게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쌀농사를 살려 황금들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농업의 본질을 새롭게 인식하는 사고의 대전환이 시급하다. 사고의 대전환이란 경작이나 축산 등 농업생산은 공산품 생산과는 다르게 인간과 생명체간 아낌과 보살핌이 필수적이며, 이러한 아낌과 보살핌의 관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인간적 삶살이가 보장된다는 사실의 인식을 의미한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일찍이 현대기술문명의 지배에 닦달을 당해 인간과 자연, 환경이 본래의 모습을 잃고 부품으로 전락한 현시대적 상황을 '존재 망각', '고향 상실'로 규정하고 본질에로의 회복을 촉구한바 있으나 기술의 닦달은 갈수록 집요해지고 있다.

최종성(경북북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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