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이 불면서 노숙자들에게 가장 큰 시련의 계절이 돌아왔다.지난 98년 경제위기와 동시에 노숙자 문제가 사회문제로 급부상하면서 정부는 거리에 내몰린 실직 노숙자들을 줄이기 위해 갖가지 대책을 세웠다.
하지만 당시 경제가 회복되면 노숙자 수도 함께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때문에 정부 정책이 노숙자 수용 중심의 임시방편적인 구호대책에 그쳤고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이에 따라 노숙자 관련 법을 제정, 노숙자를 노인, 장애인, 여성 등과 같이 사회복지의 한 축으로 인정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노숙자 숙지지 않나?
23일 한사람이 다니기도 힘든 비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1~2평남짓한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대구시 북구 칠성동 속칭 '쪽방'. 이곳에서 2년째 생활하고 있는 조모(45)씨는 올 겨울나기가 가장 힘들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두달전 공사장에서 갈비뼈를 다쳤는데 지금은 통증이 심해 움직이기도 힘든 실정이다.
"일을 못하니 밀린 방세 때문에 주인이 나가라고 할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어요. 상담소에서 도와주고 있지만 그저 막막할 뿐입니다".193명. 올 10월 현재 정부가 지원하는 대구시내 5곳의 노숙자 쉼터에 등록돼 있는 노숙자 수다.97년말부터 동대구역, 대구역 등지에서 늘기 시작한 노숙자 수는 지난 99년 10월 쉼터 노숙자가 250여명으로 최고조에 달했다가 이후 서서히 줄어 지금은 190~200여명 수준을 유지하는 등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쉼터 노숙자 외에 110여명의 거리 노숙자와 쪽방 등에서 생활하고 있는 1천여명의 잠재적인 노숙자까지 감안하면 노숙자 문제는 더이상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
△거꾸로 가는 노숙자 정부정책.
정부가 올해 대구시내 5곳의 노숙자 쉼터에 지원하는 운영비는 모두 2억9천여만원. 지난 99년 3억3천여만원이던 것에 비해 4천만원 줄었다.노숙자들의 자활 및 재활을 위한 사업비도 지난 2000년 정부가 노숙자 쉼터에 1억1천만원을 지원했으나 올해는 7천만원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대구시 복지정책과 관계자는 "지난 98년부터 시작된 노숙자들을 위한 지원예산중 중앙정부가 85%를 부담했으나 올해부터는 70%로 줄이는 바람에 가뜩이나 어려운 대구시 재정에 부담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쉼터에 등록된 노숙자들은 정부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어 거리 노숙자나 쪽방에 거주하는 잠재적인 노숙자보다 사정은 나은 셈이다.지난 97년 부인과 이혼한뒤 대구역, 지하도 등지에서 생활해 왔다는 이모(51)씨는 얼마전 갑자기 호흡곤란 증세를 보여 신음하는 것을 동료 노숙자가 쪽방상담소로 옮겨 놨다.
상담소 직원과 함께 간 한 대학병원에서 기흉으로 판정받았지만 이씨가 노숙자라는 이유로 입원하려면 10만원의 보증금을 내라는 얘기를 들었다.이씨는 "숨을 제대도 못 쉬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입원 보증금을 내라는 경우가 어디 있냐"며 "또 1종 의료급여대상자인데도 보험 적용이 안 된다며 열흘간 입원치료비 8만원이 계산돼 나온 것은 나같은 사람은 병원에도 오지 말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올해 대구지역 노숙자 쉼터에 거주하는 193명의 노숙자를 위한 정부 의료지원비는 1억800여만원. 한사람당 500만원의 의료혜택을 볼 수 있는 셈.하지만 만성 및 중증 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이 수술 등 제대로된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대구쪽방상담소 허영철(33) 상담실장은 "의료보험 적용이 안 되는 항목 많아 1종 의료급여대상자라도 본인부담금이 많다"며 "만성 및 중증 질환을 앓을 경우 수술은 고사하고 장기간 입원도 힘든 실정"이라고 말했다.
△노숙자 정책 다시 세워야.
노숙자 쉼터 관계자들은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노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노숙자를 사회복지의 한 분야로 인정, 사회적 합의를 통해 노숙자에 대한 법제화 마련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전국실직노숙자대책 종교시민단체협의회 조현자(45.여) 회장은 "제도적인 뒷받침과 함께 노숙자 쉼터를 노숙자의 근로능력과 건강상태에 따라 자활, 치료, 재활의 장으로 전문화시키는 등 정부의 구체적이고 장기적 안목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현재 수용 중심의 노숙자 쉼터 체계는 응급구호 측면이어서 전면적인 지원체계 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대구노숙자상담센터 현시웅(33) 소장은 "거리노숙자들의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전문화된 쉼터 입소로 유도한뒤 자활지원, 심리재활, 각종교육, 의료지원 등을 통해 자활능력을 키워 사회에 복귀하도록 하는 시스템 구축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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