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세이-이 감성의 계절에

입력 2002-10-26 00:00:00

이제 들녘은 수확의 계절답게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길가에는 개미취가 창백한 얼굴로 새벽 찬바람에 허리를 접고 있다. 더러는 서리를 맞은 듯하다. 애처롭다. 모든 씨앗들은 포근한 흙 속에 들어가 여린 생명을 다음 세대로 넘겨줄 채비를 한다. 영국의 시인 셸리는 노래했다. 이 씨앗들은 꿈꾸는 대지에 봄의 나팔 소리가 울려퍼질 때까지 차고 낮은 곳에서 무덤 속의 시체처럼 누워 있어야 한다고.그렇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어둡고 춥고 낮은 곳에 내려온다. 높은 나무만 허전하다.

이제 플루토가 지배하는 어둠의 계절이 올 것이다. 셸리가 아르노 강가에서 서풍을 맞으며 계절을 길게 탄식한 것은 계절이 바뀌고 서풍이 불어온 까닭이다. 계절이 주는 감성 때문이다. 고대 희랍인들은 계절의 변화와 기쁨을 음미하는 축제를 지냈다. 디오니소스제가 그 하나이다. 포도의 신을 기리는 디오니소스제는 주로 연극을 상연하여 신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감성이 깨어날 때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제물이 연극인 셈이다. 핏덩이 고기보다는 연극을 차려놓으라고 했으니 신통한 신이 아닌가. 이 신통한 신은 포도의신이라기보다는 연극의 신이요 문학의 신이다. 계절이 바뀌는 틈바구니에는 언제나 감성이 깨어난다. 가을 바람 소슬하면 감성이 깨어난다. 감성은 언제나 색다름을 요구한다. 그 색다름이 바로 예술이 될 수 있다. 감성이 깨어날 때 그것에 걸맞은 우리의 색다른 행위가 있어야 한다. 모두들 똑 같은 일상에 지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디오니소스제 같은 제의로써 계절의 색다름을 만끽해야 한다. 가을달이 파란 얼음 덩어리처럼 떠갈 때, 그 싸늘한 감동을 어디에 바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없는가.우리는 계절의 제단에 작은 문학제를 올리려 한다. '한국문학인대회'가 그것이다. 이 행사가 이교도 신을 모시는 제의처럼 들린다면 '문학의 향연'이라 해도좋으리라.

문학제든 향연이든 이 제의의 본뜻은 이런 데 있다.뿔뿔이 흩어진 것을 다시 불러모으고, 아픈 곳을 치유하고, 숨은 것을 들춰내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도록 하는 데 말이다. 깔끔하고 통제된 예술공연과는 다르다. 이 제의는 혼란스러워야 하고, 흥청거려야 하고, 무질서해야 하고, 쿵작쿵작거려야 한다. 이런 제의가 오늘날의 갈라진 마음을 치유하는 데 더없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 제의를 위해 먼데서 사람이 온다. 토정비결에서 말하는 '귀인'들이 온다. 학자가 오고 시인이 오고 소설가가 온다. 그들은 그들의 문학을 이야기하러 온다. 그들은 생각도 다르고, 옷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또 무엇보다도 감성이 다르다.우리는 다른 감성체계를 보면 자주 희열을 느낀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그것이고, 건축물에서 느끼는 놀라움이 그것이다. 바람둥이가 여자를 갈아가면서 사귀는 이유도 여자마다 색다른 감성이 있기 때문이다.문학을 공연예술로…

감성이 다르면 물론 사랑도 달라질 것이다. 이 제의에는 또 문학을 공연예술로 바꾸자는 의미도 있다. 동서양 할 것 없이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문학은 문자의 껍질을 쓰게 되었다. 문자 이전의 문학은 구비문학이었는데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 공연이었다. 문학이 문자로 기록되어 천년만년 즐길 수 있는 것은 좋지만, 잃어버린 것도 너무 많다. 바로 예술매체가 가지는 감성 체계이다. 겨울밤 할머니의 구수한 이야기는 모두 동화책 기호 속으로 들어갔다. 그건 딱딱한 문자이고 문법이다.

우리 문학제는 다시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복원하려고 한다. 문학을 활자 밖으로 꺼내자는 것이다. 할머니의 목소리와 사랑과 온기를 복원하자는 것이다.다시금 '공연의 문학', 소리든 몸짓이든 '문자 밖의 문학'을 해 보자는 것이다.

박재열(시인.대구세계문학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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