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춤꾼 최승희-(하)민족무용 현대화 초석 다져

입력 2002-10-23 14:09:00

최승희가 활약하던 시절, 세계적으로 민족무용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아르헨티나, 인도의 우다이샹카 정도가 인정받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무용'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이었고 춤은 광대나 기생들이 추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최승희는 이 시절 농민, 광대들이 추는 탈춤, 그리고 기생들이 추던 고전 무용같은 춤을 무대예술무용으로 재창조하는 큰 역할을 담당했다.

또 그 시기 민족의 정서를 예술무용작품에 반영, 민족문화의 부흥을 가져왔다. 1994년 발행된 김일성 회고록에는 "최승희는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했다…(중략)…현대 조선민족무용 발전의 기초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일제에 억눌렸던 민중들은 최승희의 세계적인 활약으로 민족적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최승희 춤의 영향은 우리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 일본까지 향했다. 1941년 4월 그녀의 중국 공연은 당시 중국 경극계에 큰 파문을 가져왔다. "옛 형식에 현대적 생명을 부여해야 한다"는 최승희의 예술사상과최승희가 새롭게 창작한 중국춤은 중국 무용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최승희는 중국 경극지도자들에게 원시 그대로 남아있는 중국 가무극을무대예술로 정리하는 방법을 제시해 경극 연기를 체계화시켰다.

중국 무도협회 부주석 쟈 쭈어광은 "중국 경극무용의 기본동작을 정립하고 무대화 한 그녀의 시도는 중국 무용 현대화에 공헌했다"고 최승희의 역할을 평가한다. 일본무용계에서도 최승희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 당시 일본무용계는 가부키 등 전통적인 춤은 너무나 전통에 집착하고, 현대무용은 지나치게 전통을 외면하는 극단적인 상황이었다. 최승희의 작품은 일본무용가들에게 자신의 민족무용을 뿌리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깨우쳐주었고, 일본인들은 최승희의 춤에 열광했다.

최승희는 중국 무용의 다양한 형과 일본 무용의 색, 조선무용의 다양한 선을 활용한 동양발레를 창조해야 한다는 점을 과제로 삼고 각 국 순회공연을 할 때 마다 각 나라 전통무용과 작품을 접목해 발표했다.

최승희의 제자 김백봉 선생에게 사사받은 장유경(계명대 무용학과) 교수는 "김백봉 선생님은 최승희 선생님이 남한에 있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아쉬워했다"고 전했다. 또 "한국 무용은 궁중무용을 제외하고는 스스로 즐기는 춤이 대부분이었는데 최승희 선생은 이것을 완벽하게 무대화시켜서 관객을 위한 춤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최승희 탄생 90주년은 한국 무용의 역사와 같이 한다. 최승희는 무용을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진정한 예술로 전환 시킨 무용의 선구자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