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춤꾼 최승희(중)-탄생 90주년 삶과 예술

입력 2002-10-02 14:08:00

최승희는 1935년 신코 시네마에서 제작한 영화 '반도의 무희'에 주연으로 출연하였고 음반도 취입했다. 약품, 학용품, 과자 등의 광고 모델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의 사진으로 만든 엽서까지 나왔으니 대중들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최승희는 일본, 조선, 중국 등의 인기에 힘입어 북미, 유럽, 남미 등지를 돌며 순회공연을 시도하게 된다. 1938년 한국인 최초의 무용 공연을 보고 미국의 각 언론은 극찬을 했다.

"최승희는 현재 세계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의 한사람이다"(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동양의 낭만적인 춤에서 전쟁 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저마다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다"(로스앤젤레스 헤럴드 앤드 익스프레스).

당시 그녀는 무용의상을 김정완 화백에게 맡겼고 그 특색있는 의상은 이국의 관중들 눈길을 끌었다. 김정완 화백은 1937년 파리 전람회 동양부분에서 한국인 최초로 1등을 수상한 당대 일류 화가였다.

얼마 전 자신을 남한에서 최승희의 유일한 혈육이라고 밝힌 최광섭(76.북구 읍내동)씨는 당시의 최승희를 기억하고 있었다. "고모는 당시 유명한 무당을 불러 굿을 시켜놓고 지켜보면서 무당춤을 연구하곤 했다"면서 "명랑하고 활달했으며 노래도 잘했는데, 해외 공연을 다녀오면서 과자를 사다주곤 했다"고 회상했다.

미국에 이어 파리 공연에 성공하자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지역 등 유럽 각국을 누비면서 '동양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았다. 세계적 무희로 일본과 중국, 조선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1942년 일제의 강요로 전선위문공연을 떠나 조선.만주.중국에서 130여회에 달하는 공연을 해, 친일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그러나 조카 최광섭씨는 "중국 공연 수익금의 일부는 고모부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인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1944년 도쿄에서 20일간 24회의 연속 독무공연을 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장기 독무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의 공습이 시작될 무렵 일본을 탈출해 중국 북경으로 건너간다.

해방 후 1946년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한 최승희는 '평양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만들었다. 딸 안성희도 무용으로 이름을 날리고 1955년 최승희는 북한 예술가로는 가장 명예로운 인민 배우가 되었다.

58년에는 책 '조선민족무용 기본', '최승희 무용극 대본집'을 발간했다. 그러나 남편 안막이 숙청되면서 무용활동이 중단되었다. 1967년 최승희가 숙청되었다는 기록이 한국의 북한문제연구소에서 나왔고 일본 아사히 신문에도 숙청 기사가 실렸다. 이후에는 최승희와 그의 자녀인 안성희, 안병건의 생사 여부를 알 수가 없다.

최세정기자 beaco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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