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장이 35년 올해의 명장 우뚝

입력 2002-09-30 14:03:00

'명장(名匠)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양복장이 35년만에 대한민국 명장의 반열에 오른 김태식(49.베르가모테일러 대표)씨는 양복에 관한 한 최고의 기술을 인정받고 있다.

최근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각 분야의 최고기능인을 선정, 발표하는 '올해의 명장'에 오른 것도 그의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양복 재단사 최고의 영예인 명장에 선정된 재단사는 이제까지 전국에서 고작 10여명으로 대구에서는 김씨가 최초다.

경북 고령이 고향인 김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2때 학교를 중퇴했다. 당시 양복 재단일을 하고 있던 사촌 형님의 권유로 바늘을 손에 잡은 것이 1967년. 그의 나이 15세때다.

어릴 때 골무인지도 모른 채 손에 끼고 놀 정도로 바느질과 인연이 있었다는 김씨는 견습시절 한번 잡으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승부욕과 뛰어난 손재주로 남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평균 7년에서 10년이 걸린다는 견습 꼬리표를 불과 2년만에 뗀 김씨는 선배들을 제치고 먼저 상의공(上衣工)으로 발탁되는 등 일취월장했다.

그의 성공은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와의 싸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번 바늘을 잡으면 부족한 부분이 보완될 때까지 거듭하는 근성과 눈을 감고 바느질을 연습할 정도의 장인기질, 민첩하고 세심한 바느질을 위해 잠잘 때 부드러운 크림을 손에 바른 후 목장갑을 끼고 잘 정도로 철저한 자기관리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20대 청년시절에는 1년에 200일정도 밤을 새워 일할 정도로 혼신을 다했다. 그 결과 입문한 지 10년만인 1979년, 의복 공정을 지휘하는 선장격인 재단사가 됐다. 비록 자기 사업이 아닌 피고용인의 위치였지만 김씨는 자기 이름을 걸고 옷을 만들었다. 다른 재단사보다 더 편하고 몸에 맞는 양복을 짓기 위한 그의 노력은 그치지 않았다.

1984년은 김씨에게 잊지 못할 해다. 자기 이름을 단 간판을 내걸고 독립한 것. 동아양봉원 부근에 문을 연 '김태식테일러'는 불우했던 청년시절에 대한 보상이었고, 노력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돈 버는 일에만 열중하지 않았다.

88년 재소자들의 재활을 위해 무료직업훈련에 나서면서 수많은 후진을 길러내는 일에도 땀을 흘렸다. 요즘도 매주 이틀은 교도소에서 시간을 보낼 정도다.

기술을 전수한 후배와 제자들 중 지방 및 전국기능경기대회 입상자만도 25명.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했던 자신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봉사의 수고로움이 전혀 힘들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어려움도 없지 않았다. 기성복에 밀린 맞춤양복이 사양산업인 탓에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992년부터 2년동안 가게 문을 닫기도 했다. 80년대 후반 대구에 1천여곳이던 맞춤양복점이 현재 100곳에 불과한 것만 봐도 업계 형편을 잘 알 수 있다.김씨는 평소 만나는 이들에게 "우리 집에서 옷 한벌 맞추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목욕탕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신체와 동작을 유심히 관찰, 재단에 활용하는 등 연구하는 자세만큼은 누구 못지 않다. 꾸준히 패션쇼도 개최하고 선배들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양복관련 외국서적을 찾아 탐독하는 등 기술투자에는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았다.

후배, 제자들에게도 "좋은 일을 많이 접해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고 그는 늘 강조한다. 특히 기술자와 기능공을 위해 양복실습교재를 발간해 배포하는 등 자기가 가진 것을 많은 사람과 나누는 마음 또한 명장의 칭호에 걸맞다.

지난 6월 김씨는 중구 대봉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베르가모 김태식테일러'(053-426-5222)라는 상호로 재출발한 그는 얼굴 윤곽이나 신체구조와 조화를 이루는 옷, 편한 옷을 위해 오늘도 바느질을 멈추지 않는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옷을 연구하는 명장 김태식씨의 최고 옷 만들기는 계속되고 있다.

서종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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