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南山 인쇄골목축제

입력 2002-09-27 14:28:00

활자 매체는 오랜 세월 우리 생활뿐 아니라 정신문화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세계의 언론들은 금속활자의 발명이 지난 1천년 동안 인류 문화에 가장 위대한 공헌을 했으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도 구텐베르크를 꼽았다.

하지만 이는 서구 문명을 중심으로 본 관점이다. 우리의 인쇄 기술은 신라시대부터 보급됐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 우리의 것일 뿐 아니라 금속활자의 발명도 구텐베르크보다 무려 200년이 훨씬 넘게 앞서 있었다.

▲1996년 10월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2층 탑신부에 봉안한 사리함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석가탑을 세운 때가 751년이어서 이 다라니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1234년에 제작된 '고금상정예문'이 최초의 동활자로 인쇄됐으니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도 우리 것이지 않은가.

▲이 같이 우리민족이 세계를 향해 '유구한 문화민족'이라고 내세워온 근거는 인쇄문화가 어느 나라보다 일찍 발달했고, 그 꽃인 서적들이 우리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듯 찬란했던 우리 선조들의 문화를 꾸준히 발전시켜 오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정보화.디지털 시대를 맞아 인터넷 보급률도 우리나라가 캐나다.미국에 이어 세계 3위를 달리고 있다지만, PC들이 오락.채팅 등으로 오용되고 있어 씁쓰레하게 만든다.

▲대구 인쇄인들의 축제인 '남산 인쇄골목축제'가 10월 2일부터 이틀간 중구 남산동 인쇄골목에서 열린다 한다. 남산동 인쇄정보협의회가 침체된 인쇄 관련 업계의 활성화를 위해 중구청의 후원으로 마련되는 이 축제는 '체험의 장'(전시회), '축제의 장'(개막식), '화합의 장'(체육대회)으로 나눠 펼쳐지며, 600여 업체가 참여하는 모양이다. 영상 매체가 '공룡화'되면서 급격한 사양길을 걷고 있는 인쇄업계의 자구책을 위한 안감힘의 소산이지만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랭커스터 교수는 이미 20여년 전 '종이 없는 사회'를 예견했으며, 최근에는 그런 사회가 가져다주는 역기능에 반감을 가지게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이제 활자 매체를 축으로 하는 인쇄문화가 그 역할의 상당 부분을 영화.텔리비전.컴퓨터 화면 등에 넘겨 주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인쇄골목축제는 인터넷 열풍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 인쇄문화의 값진 교훈을 되새기게 하고, '인터넷 정원에 있는 모든 것은 과연 장밋빛인가'라는 화두를 새삼 던져보게 한다.

이태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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